이용익 李容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
출생-사망: 1854년(철종 5)~1907년
대표관직: 내장원경, 중앙은행총재, 탁지부장,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의 전신) 설립
조선 말기의 정치가.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다.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에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그 뒤 고향을 떠나 한때 보부상으로 행상하여 자금을 모았고, 함경남도 단천에 와서 금광에 투자, 거부가 되었다.
재화를 얻게 되자 큰 뜻을 품고 한성에 올라와 민영익(閔泳翊)의 집에 기거하면서 금광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민비(閔妃)와 민영익 사이를 발빠르게 오가며 비밀연락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민영익의 천거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출세의 길을 잡았다.
단천 감역(監役)에 제수되어 금광을 관리하면서, 이재(理財)의 능력을 인정받아 1897년 내장원경(內藏院卿)에 발탁되었다. 왕실재정을 맡아 궁내부 소속의 삼포(蔘圃)와 광산을 엄중 관리하여 왕실수입을 늘렸다.
또한, 탁지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전환국장(典讌局長)을 겸무할 때 개정화폐조례(改正貨幣條例)에 따라 국가재정을 충당하고자 백동화(白銅貨)를 대량 발주하였다. 그러나 백동전 대량 발주는 물가앙등과 화폐가치 하락을 가져온다고 하여 당시 독립협회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의 명문 세족은 아니었으나 어렸을 적부터 서당에서 유교 교양을 갖춰 강직한 성품이었고, 청렴하고 이재에 밝은 정치가로 식견이 탁월하여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리하여 서북철도국총재·중앙은행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근대 개혁에 기여하였다.
재직시에 내장사의 직조소(織造所)를 근대적 공장으로 개편하고자, 모범양잠소를 설치하여 근대적 견직기술을 강습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 도에 공업전습소를 설치하여 염직·직조업·제지업·금은세공·목공의 근대 기술자 양성을 시도하였다. 또한, 사기(沙器)제조회사를 서울에 설립했으며, 총포공장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1898년 정부에서 근대식 석판인쇄기계를 도입하여 우표·상표·지계(地契) 등을 인쇄, 발매하고, 1903년에는 박람회를 개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철도의 부설, 근대금융기관의 설립 등에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는데, 이와 같은 근대적 개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입장은 일관성 있게 친로반일(親露反日)적 입장을 고수하여,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정부로 하여금 조선의 엄정중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그 결과 전쟁 중 일본으로 압송되어 온갖 회유정책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납치되어 있을 때, 일본의 개화문물에 접하고,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입하여 귀국하였다.
그 뒤 민족의 역량을 배육하고자 자비로 보성소학(普成小學)과 중학 그리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장차 국가의 동량이 될 인재를 키워내기에 힘썼다. 그리고 편집소 보성관(普成館), 인쇄소 보성사(普成社)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것도 이 보성사에서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권이 박탈되고 이른바 보호정치가 시작되자, 육군부장(陸軍副長)이라는 직명으로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하던 중 6월에 중국 산둥성 옌타이항(山東省煙臺港)에서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었다.
이 때 밀령의 책임을 추궁 받을까 염려한 조선 정부에 의해, 일체의 모든 공직에서 파면되었다. 그 뒤 해외를 유랑하면서 계속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객사하였다. 사망 시에 고종에게 유소(遺疏)를 남겼는데, 거기에는 ‘광건학교(廣建學敎), 인재교육(人材敎育), 국권회복(國權回復)’ 등을 강조하였다.
*참고문헌: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매천야록(梅泉野錄)』
『조선화폐고』(유자후, 학예사, 1940)
경제개혁에 기여한 고종의 충신, 이용익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은 보부상 출신으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황실의 재정을 담당하였습니다. 국가 재정을 강화하기 위해 경제정책을 주도하였고, 개혁당을 조직하여 친일파와 맞섰던 고종의 충신, 이용익.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해외에서 구국운동을 펼치다 친일파 자객의 총탄에 생을 마감하고 만 이용익의 삶을 돌아보겠습니다.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고종의 신임을 얻기까지
이용익은 185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가난한 서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전주, 자는 공필(公弼)이며 호는 석현(石峴)이다. 그는 체계적인 학문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소년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뒤 고향을 떠나 젊은 시절동안 보부상과 물장수 등으로 연명하며 전국을 다녔습니다. 함경남도 단천에 와서 보부상으로 모은 자금을 금광에 투자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데요. 이후 큰 뜻을 품고 한성에 올라와 민영익의 집에 기거하면서 금광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친분을 쌓았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장호원으로 피신하자, 남다른 빠른 걸음으로 이들 사이의 비밀연락을 담당하여 민영익의 신임을 얻었는데요.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압송되고 민비가 다시 환궁하자 민영익의 천거로 종9품의 관직인 감역이 되었습니다. 이후 단천 감역으로 금광을 관리하면서 금맥을 찾는 특별한 재주를 인정받았고, 왕실의 재정을 키운 공로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어 단천부사로 특진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1887년 영흥부사와 함남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며 왕실재정을 관할하는 역할을 도맡게 되었는데요. 이처럼 그는 당시 명문세족은 아니었으나 강직한 성품과 이재에 밝은 정치가로 식견이 탁월하여 고종이 가장 신임하는 관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1888년과 1896년 불법적인 수탈로 민란이 발생하여 관직에서 파면되고 유배를 당하였습니다. 관직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으나 광산 경영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재기에 성공하였죠.
근대 개혁에 기여하다
이용익이 정계에 영향력을 크게 미치게 된 것은 1897년 황실의 재정을 총괄하는 내장원경에 발탁되면서부터 였습니다. 그는 감리서북광무 겸 감사철도사를 거쳐 원수부 회계국 전환국장·서북철도국 총재·중앙은행 총재 등을 겸임하였는데요. 1902년 탁지부 대신이 되어 개정화폐조례에 따라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동화를 대량 발주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황실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 인삼을 황실 전매사업화하였고, 외국인의 광산채굴을 금지하고 광산관리를 철저하게 시행하였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국가소유 토지인 역토(驛土)와 둔토(屯土) 등을 내장원에 귀속시키는 한편 봉세관을 파견하여 세금 징수를 강화하였죠. 이밖에도 내장사의 직조소를 근대적 공장으로 개편하기위해 모범양잠소를 설치하여 근대적 견직기술을 강습하게 했으며, 각 도에 공업전습소를 설치하여 염직·직조업·제지업·금은세공·목공의 근대 기술자 양성을 시도하였습니다. 또한 사기제조회사를 서울에 설립했으며, 총포공장을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철도의 부설, 근대금융기관의 설립 등에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는데, 이와 같은 활동은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개혁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일관성 있게 친러반일적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여 일본 자본을 막고 대한제국의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시도하였는데요.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용익은 고종을 설득하여 대한제국의 중립을 선언하도록 했습니다.
위기를 느낀 일본은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1904년 외무대신 이지용을 내세워 한일의정서를 체결합니다. 이때 이용익은 이를 반대하였다가 일본으로 강제 납치되었는데요. 그는 일본에서의 온갖 회유정책을 모두 거절하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이듬해 귀국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에 억류된 10개월 동안 일본의 근대화된 문물을 접하고 교육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는데요. 일본에서 귀국할 때 구입해 온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로 보성사 인쇄소를 차리고 보성학원(지금의 고려대학교, 보성중·고등학교)을 설립했습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것도 바로 보성사라는 인쇄소였죠.
그는 귀국 후 군부대신에 기용되었으나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일제의 압력으로 결국 사퇴하였는데, 이후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국권이 박탈되고 이른바 보호정치가 실시되자, 프랑스·러시아 세력과 제휴를 꾀하라는 고종황제의 밀령을 받고 육군 부장이라는 직명으로 프랑스로 향했습니다. 1906년 6월 풍랑으로 중국 산둥성 옌타이항에 잠시 머물렀다가 현지 일본관헌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책임 추궁을 염려한 대한제국정부에 의하여 모든 권한을 박탈당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여 구국활동을 펼쳤으나 여의치 않자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로 가기 직전에 친일세력이 파견한 자객 김현토의 총을 맞고 중상을 입었는데요.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용익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요양하는 한편 구국운동을 계속하다가 1907년 2월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사망 시에 고종에게 유소를 남겼는데, 이를 통해 ‘광건학교, 인재교육, 국권회복’ 등을 강조하였죠.
그가 생을 마감한 후 그의 정적이자 그를 모함했던 친일파 상당수가 일본의 강제합병에 공헌한 대가로 일제로부터 작위와 재물을 받았는데요. 이용익의 가문은 일제에 의해 재산과 직위를 몰수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용익의 손자인 이종호는 조부를 이어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여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친일파들로부터 ‘친러파’로 낙인찍힌 이용익은 ‘친일과 반공’으로 이어진 우리 근현대사 속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요. 다행히도 지난 2002년 고려대학교 재직한 조익순․이원창 교수 공저인 '고종황제의 충신 이용익의 재평가'라는 저서로 선생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나온데: 이달의보훈스타-독립운동가및6.25전쟁영웅
http://cafe.naver.com/bohunstar/25999
이용익의 출생과 성장배경을 재해석·재평가한 책들
《고종황제의 충신 이용익의 재평가》, 조익순·이원창 외 저, 해남, 2002, pp.45~144
《고려대학교의 사람들》 1.이용익,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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