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수상자들

졸리오퀴리 부부

여여니(여연) 2005. 4. 8. 12:13

졸리오퀴리  Jean Frédéric Joliot-Curie 1900∼1958

 

*  : 노벨상|졸리오퀴리(*Irène / Frédéric)|퀴리(*Pierre / Marie)

*검색어: 노벨화학상|프레데릭 졸리오|졸리오퀴리 부부|퀴리부부|장 프레데릭 졸리오퀴리|장 프레데릭 졸리오

 

    : 노벨상 수상자, 프랑스 물리학자

주요수상: 노벨화학상(1935)

    : 1900년 3월 19 프랑스 파리

    : 1958년 8월 14 프랑스 파리

 

프랑스 물리학자. 1900 3월 파리 출생.

 

아버지는 상인이었다. 파리의 물리화학대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라듐연구소에 들어가 노벨상 수상자였던 마리 퀴리(Marie Curie)의 조교가 되었다. 1926년 마리 퀴리의 딸 이렌 퀴리(Irène Curie)와 결혼하였다. 프레데릭 졸리오는 퀴리라는 성()이 없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두 사람 성을 합쳐 졸리오퀴리라고 하였다. 1930년 방사성원소의 전기화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원자구조에 대한 연구를 부인과 함께 진행하다가 1934년 새로운 인공 방사성 원소들을 발견했다. 붕소, 알루미늄, 마그네슘에 알파 입자의 충격을 가해 질소 동위원소13, 인 동위원소30, 그리고 규소 동위원소27과 알루미늄 동위원소28을 만들어냈다. 이 물질들은 자연상태로는 발견되지 않고, 충격실험 후 일정 시간이 지나서 양전자와 음전자의 방출로 자동분해한다.

 

이 중대한 발견으로 1935년 부인 이렌 졸리오퀴리(Irène Joliot-Curie)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이로써 부부가 2대째 이어서 노벨상을 받은 첫번째 예로 기록되었다. 그는 1937년 콜레주드프랑스의 교수가 되었고, 부인을 도와 오르세 핵물리학연구소를 창립하였다. 정치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세계평화평의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58 8월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졸리오퀴리  Irène Joliot-Curie 1897∼1956

 

    : 노벨상 수상자, 프랑스 물리학자

주요수상: 노벨화학상(1935)|

    : 1897년 9월 12 프랑스 파리

    : 1956년 3월 17 프랑스 파리

 

프랑스 물리학자. 1897 9월 파리 출생. 노벨상 수상자였던 피에르 퀴리(Pierre Curie)와 마리 퀴리(Marie Curie)의 딸이다.

 

파리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고, 1차세계대전 중에는 방사선을 담당하는 간호사로 활약하였다. 1925년 폴로늄의 α선에 대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6년 어머니 마리 퀴리의 조교로 일하고 있던 프레데릭 졸리오(Frédéric Joliot)와 결혼하였다. 1934년 남편과 공동연구를 통해 <방사성 물질의 인공적 생성, 물질 변환의 화학적 증거>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새로운 방사성 원소들의 발견으로 1935년 남편 졸리오퀴리(Frédéric Joliot-Curie)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이로써 부부가 2대째 이어서 노벨상을 받은 첫번째 예로 기록되었다.

 

1938년에도 우라늄 핵분열 발견의 결정적 계기가 되는 중성자 운동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오르세 핵물리학연구소 창립에 관여하였다. 여성의 사회적이고 지적인 진보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국립프랑스여성연합위원회와 세계평화평의회 회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56년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나온데: 파스칼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