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

청량국사 징관_불교사상가

여여니(여연) 2008. 6. 2. 15:03

18.청량국사 징관

화엄종 제4조로 추앙받고 있는 청량국사 징관(澄觀, 738~839)의 성씨는 하후(夏侯), 자는 대휴(大休), 시호는 청량이며, 지금의 중국 절강성 소흥현 출신이다. 아홉 살에 체진대사 문하에서 출가득도한 뒤 ‘이관(理觀)’을 수행했다. 화엄을 전해준 스승 법선화상으로부터 ‘법계는 모두 너에게 있다’고 인가를 받았다. 화엄뿐만 아니라 계율을 익히고, 열 가지의 서원을 세우는 등 수행을 철저히 했다. 내전은 화엄 이외에 법화.천태학, 우두선, 남종선, 북종선, 삼론교학을 배웠으며, 외전은 경.전.자.사(經傳子史)를 비롯한 중국의 구류이학(九類異學)은 물론 인도의 4베다.5명(明)등을 두루 섭렵했다. 그의 박학다식함은 대흥선사에서 진행된 역경장에 참가하여 6년간 경전 77부를 번역하는데 기여했다. 저서는 총 42종 600여권 가운데 현재 21종 400여권이 남아있다.

 

계율 익히고 십대서원 세우며 수행한 화엄종 4조

 

 # 실천적인 화엄 찾아 오대산으로

징관은 당 태종 때 화엄성지 산서성에 소재한 오대산으로 옮겨 그곳에서 수행했다. 그가 오대산으로 찾아간 계기는 〈화엄경〉 ‘제보살주처품’ 가운데 “문수보살이 오정(五頂)을 비추어 본다”는 구절을 알고자 함이었다.

 

사진설명 : 중국 산서성 오대산 현통사 조사전에 봉안된 청량국사 좌상.

 

당시는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난 직후였기 때문에 사회가 매우 불안한 상태였지만, 진리탐구의 굳은 신심과 원력으로 만리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대산 대화엄사(현 현통사)에서 하동절도사 이자량의 요청으로 태원 숭복사로 옮겨갈 때까지 약 15년간 〈화엄경〉을 연구.강의하고 이를 토대로 〈화엄경소〉 〈연의초〉를 저술했다.

그가 왜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장안을 떠나 험난한 오대산을 찾아갔을까. 징관은 장안의 종남산에서 화엄종의 전통교학을 깊이 학습하여 화엄종의 전통을 계승했으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시대는 이미 교학의 연구에서 실천적 화엄으로의 변화를 요구했다. 이에 부합되는 곳이 오대산으로 그곳은 실천적 화엄행자들이 수행한 곳이기도 했다.

 

사진설명 : 징관국사가 〈화엄경〉을 공부하고 강의한 현통사 무량전.

 

〈화엄경소〉 100권을 저술한 후위(後魏)의 영변은 1년 동안 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 주위를 도는 행도수행을 했다.

이 전통은 ‘불광관(佛光觀)’을 수행한 해탈선사와 중국 전통사상인 유교는 물론 노장사상까지 과감히 받아들여 〈신화엄경론〉을 저술한 이통현 장자에게 계승됐다. 그들은 하나같이 중생구제의 이타행을 중시하는데, 이러한 실천적 화엄은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실천하고자 하는 이타행이 징관의 생각과 일치했다.

또 오대산에서는 구역 〈60권화엄경〉 보다 내용이 풍부하고 체계를 갖춘 신역 〈80권화엄경〉에 대한 연구가 이통현 장자에 의해 진행된 곳이다. 또한 당의 여제 측천무후의 도움으로 화엄석경이 조성된 것도 무시 할 수 없었다. 이는 곳 시대의 변화와 함께 불교계 내부상황의 변화와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징관은 장안(종남산)의 화엄사상에 안주한 정법사혜원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새로운 화엄사상을 담은 〈신화엄경〉을 직접 강의도 하고 해설서인 〈화엄경소〉와 〈수소연의초〉를 저술했다. 기존의 화엄교학 연구의 틀에서 벗어나 민중과 함께 살아 숨 쉬는 실천적이고 역동적인 화엄사상을 펼치고자 한 것이다. 이는 각지에서 〈신화엄경〉을 100여회 이상 강의.해설하고 무차대회를 20여회 이상 개최한 점과 화엄사상을 실참수행으로 연결하기 위해 〈법계현경〉 〈삼성원융관〉 등 수행지침서의 저술한 점 등으로 충분히 입증된다.

 

# 법계의 궁극적인 의미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화엄사상이란 무엇일까. 화엄교학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내용을 들라하면 우리는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것을 ‘십현문.육상문’ 등을 제시한다.

이러한 교학체계는 이미 징관 이전 화엄종의 지엄.의상.법장등 쟁쟁한 고승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징관에게 있어서 화엄교학의 연구는 필수였지만 실천적이고 역동적인 화엄사상을 펼치기에는 미진한 면이 많았다. 그래서 ‘법계(Dharma-dha-tu)’에 주목하고 새로운 화엄사상의 키워드로 삼았다.

징관은 법계를 ‘진리의 궁극적인 상태로서 진리 그 자체이며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라고 전제하고, 성기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화엄경소〉 서두에서는 “왕(往)과 복(復)이 끝이 없으나 동과 정이 하나의 근원이며, 수많은 오묘한 작용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여유가 있고, 언어와 사고를 초월하여 이 보다 훨씬 더 벗어난 것은 오직 법계 뿐이네”라고 제창한다.

뿐만 아니라 ‘법계란 가고 옴에 아무런 장애가 없이 자유자재로 활동 할 수 있는 장소이면서 그 근원은 작용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동일하다. 그러면서도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어와 사고를 초월하여 이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세계이다’ 고 부연한다. 말 그대로 법계의 초월성과 절대성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살행의 바다는 넓고 커서 끝이 없으며, 낱낱의 행도 전부 진리와 합치하므로 끝이 없다(無際)’고 한다. 즉, 법계란 보살행 그 자체라고 이해한 것이다.

더 나아가 “법계란 화엄경의 근본이며, 모든 경전에 통하는 본체이며, 모든 진리가 공통으로 의지하는 곳이며, 모든 중생의 미오(迷悟)의 근원이며, 일체제불이 깨달은 곳이며, 모든 보살행이 나오는 곳이며, 처음 성불하여 돈교를 설한 까닭이며, 여타 경전에서 점교를 설한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고 한다.

 

“법계는 진리 그 자체로 궁극적인 상태

부처와 중생의 근본이며 보살행의 근원”

〈보현행원품소〉 의 첫머리에서도 “크고도 크도다 진리의 세계(眞界)여! 만법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공과 유를 다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모양이 없고, 언어 속에 들어있으면서도 자취가 없구나. 묘유는 진계를 얻지만 단지 유만이 아니며, 진공도 진계를 얻지만 단지 공하지 만은 않는구나. 생멸 속에서 그것을 얻기 때문에 진상이고, 연기 속에서 그것을 얻기 때문에 서로 비추어 내는구나”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징관이 이해한 법계는 모든 부처와 중생의 근본이요, 보살행이 발생하는 근본이라고 파악하고 있는 점에 큰 특징이 있다. 바로 여기에 실천적인 화엄사상을 탐구하러 오대산을 찾아간 이유가 잘 나타나있다.

그리고 또 법계를 넷으로 나누어 ‘사법계.이법계.이사무애법계.사사무애법계’라고 정의 했는데 이는 화엄초조 두순의 〈법계관문〉의 삼관과 법장의 오법계를 재구성한 것이다.

 

# 돈교와 선종

화엄종의 지엄.법장 등은 소승교.대승시교.대승종교.돈교.원교의 오교 가운데 돈교를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이 상태가 부처님 경지이며 여기에는 수행단계가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징관은 과감하게 돈교의 범주 속에 선종을 편입시켰다. 〈연의초〉에서 달마의 비에 나타난 ‘심무’에 대하여 “심무란 비록 심이 공함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깨달았다는 마음까지도 일으키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는 일체법은 일어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 만약 이와 같이 깨달을 수 있다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난다”고 설한다.

그리고 징관은 화엄의 입장에서 선종의 남종과 북종을 모두 비판하기도 한다. 북종에서 주장하는 ‘요견(了見)’은 심성을 요견한다는 뜻인데, 징관은 식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므로 결코 진지(眞知)는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진지는 무념 상태에서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종은 ‘부기심’을 가지고 현묘로 삼고 ‘집기심’을 가지고 마음이라고 한데 대하여 징관은 마음을 일으켜서 마음을 보는 것은 망상심이지 진지는 아니라고 비판한다.

한편, 남종에서는 무념이 곧 불지(佛智)라고 파악하므로, 징관은 남종에서 말하는 무념은 곧 성정(性淨)이며 진여라고 높게 평가하고, 북종의 이념(離念) 대신 무념을 제시하여 남종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여기에는 북종의 리념의 철저하지 못한 점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남종의 무념을 제시하여 남북의 양종을 회통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종의 이념을 본자리라고 해석하여 자신이 이해한 무념에 접근시켜 양쪽이 다 성정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신흥의 선종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징관의 사후 회창파불(845~847)로 인하여 불교계 내부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불교계는 재편되게 된다. 이 때 그 중심적 지위를 선승들이 차지하게 되며, 그들을 중심으로 ‘선교일치’를 제창하게 된다. 불교 외적으로는 유불도의 ‘삼교일치’가 강하게 주장되었다.

이처럼 징관은 시대의 변화를 예측하고 그 시대의 민중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실천적 화엄사상을 전개했기 때문에 송代 이후 화엄종의 제4조로 추앙된 것이다.

 

정엄스님/ 군포 정각사 주지 

[불교신문 2328호/ 5월19일자]

*등재일: 2007-06-05 오후 2:19:30 /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