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기사&미분류

해인사(브리태니커)

여여니(여연) 2005. 4. 27. 12:22
 

海印寺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의 본사로 75개의 말사와 14개의 부속암자를 관리하고 있다. 통도사·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三寶 : 佛寶·法寶·僧寶) 사찰 중 하나이며 고려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어 법보사찰이라고도 한다.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 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가야산해인사고적〉에 의하면, 신림(神林)의 제자인 순응(順應)이 766년(혜공왕 2) 중국에 건너가서 법을 전수받고 귀국한 뒤 802년(애장왕 3)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다가 갑자기 죽자 이정(利貞)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이 부석사를 창건하고 곧 해인사·화엄사·범어사 등 화엄10찰(華嚴十刹)을 세웠다고 되어있어 창건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절의 이름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되었고, 그 개조(開祖)였던 순응 역시 의상의 손제자였다는 사실 등에서 화엄사상(華嚴思想)을 근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희랑(希郞) 법사가 태조가 헌납한 전지 500결을 가지고 절을 중건하고,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크게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1398년(태조 7) 강화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겨옴으로써 호국사찰의 중심지가 되었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憙王后)가 해인사를 중건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488년 덕종의 비인 인수왕비와 예종의 계비인 인혜왕비가 학조(學祖)에게 명해 대장경판전(大藏經板殿)을 중건했으며 또 3년간에 걸쳐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법당·요사 등 160여 칸을 새로 건립했다. 1695년(숙종 21) 화재로 만월당(滿月堂)·원음루(圓音樓) 등 여러 요사채가 소실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불이 나서 무설전(無說殿) 등 나머지 요사채가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중건했다. 그뒤에도 끊임없는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는 과정을 겪었지만,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만은 피해를 입지 않고 오랫동안 보존되어왔다. 이밖에도 대각국사 의천, 사명대사 등과 같은 고승이나 최치원·이거인(李居仁)·김정희·정인홍(鄭仁弘) 등 역대 명인들이 한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적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을 비롯하여 명부전·응진전·삼성각·조사전·퇴설당(堆雪堂)·음향각·관음전·궁현당(窮玄堂)·구광루(九光樓)·경학원(經學院) 등이 있으나 대부분 근래에 세워진 것이다. 중요문화재로는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264호)·원당암다층석탑(보물 제518호)·고려각판(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해인사동종을 비롯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수많은 유물들이 해인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해인사고려각판

 

해인사 대장경판전 건물 사이의 양쪽 끝에 있는 동서 사간판고(寺刊板庫)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목판. 모두 54종 2,835판인데 그중에서 28종 2,725판은 국보 제206호로, 나머지 26종 110판은 보물 제734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말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사찰이나 지방관서에서 새긴 것으로 내용은 주로 〈금강경 金剛經〉·〈화엄경 華嚴經〉을 비롯한 불교경전과 고승들의 저술, 시문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보로 지정된 각판은 묘법연화경판(妙法蓮華經板 : 71판 116장)·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판(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板 : 39판 73장)·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판(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板 : 139판 273장)·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판(大方廣佛華嚴經世主妙嚴品板 : 8판 15장)·금강반야바라밀경판(金剛般若波羅密經板 : 6판 12장)·금강반야바라밀경판(6판 10장)·화엄경보현행원품판(華嚴經普賢行願品板 : 6판 12장)·법화경보문품판(法華經普門品板 : 2판 4장)·인천보감(人天寶鑑 : 26판 93장)·불설예수시왕생칠경판(佛說豫修十王生七經板 : 9판 16장)·삼십팔분공덕소경판(三十八分功德疏經板 : 2판 4장)·불설아미타경판(佛說阿彌陀經板 : 3판 4장)·대방광불화엄경약신중판(大方廣佛華嚴經略神重板 : 1판 2장)·화엄경변상도판(華嚴經變相圖板 : 周本 42판 84장)·대방광불화엄경판(大方廣佛華嚴經板 : 貞元本 408판 726장)·대방광불화엄경판(晋本 728판 1,318장)·대방광불화엄경판(周本 941판 1,654장)·대방광불화엄경소여래출현품판(大方廣佛華嚴經疏如來出現品板 : 57판 112장)·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여래출현품판(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如來出現品板 : 29판 52장)·금강반야바라밀경판(16판 32장)·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판(佛說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板 : 10판 19장)·대각국사문집판(大覺國師文集板 : 76판 133장)·대각국사외집판(大覺國師外集板 : 59판 105장)·남양선생시집판(南陽先生詩集板 : 13판 26장)·백화도량발원문약해판(白花道場發願文略解板 : 7판 14장)·당현시범판(唐賢詩範板 : 5판 30장)·약제경론염불법문왕생정토집판(略諸經論念佛法門往生淨土集板 : 14판 26장)·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 2판 4장) 등이다.

 

해인사대장경판

 

해인사 대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목판 대장경. 국보 제32호. 대장경은 경(經)·율(律)·론(論) 3장(三藏)의 불교경전을 비롯한 불교관계의 책들을 모두 포함해서 말한다. 1011년(현종 2)에 북송의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과 거란판대장경을 바탕으로 하여 처음으로 목판에 새긴 대장경을 대구 팔공산에 있는 부인사에 봉안했으나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1236년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호국불교적인 의미에서 당시 최우를 중심으로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1251년에 완성했다. 일반적으로 현종 때 새긴 판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 하고, 고종 때 다시 새긴 것은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 한다. 재조대장경은 강화도성(江華都城) 서문(西門) 밖의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보관하다가 1398년(태조 7) 5월에 해인사로 옮겼다.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1,516종 8만 1,258판인데, 그중 18매는 근래에 조각하여 보완한 것이며, 8만여 판에 8만 4,000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경판은 남해지방에서 많이 나는 후박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그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보통 세로 30cm, 가로 69.5cm 정도로 1면에 23행 14자가 새겨져 있다. 판목의 양 끝에는 각목을 만들어 끼우고 네 귀퉁이에 구리판을 대어 나무의 뒤틀림이나 터짐을 방지했으며, 부식을 막기 위해 옻칠을 하여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이 대장경판은 대장경판전 건물 내부에 설치된 5층 판가(板架) 위에 천(天)·지(地)·현(玄)·황(黃)의 천자함호(天子函號)와 경명(經銘)의 권차(卷次)·장차(張次) 순서대로 진열되어 있다. 또한 당시 개태사의 승통이었던 수기(守其) 등이 북송과 거란대장경 및 초조대장경을 비교·검토한 것이므로 비교적 정확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고, 1932년 일본에서 간행된 〈대정신수대장경 大正新修大藏經〉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 등에서 불교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고려시대 목판 인쇄술의 발달수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인쇄되어 널리 보급되었으며 1980년 동국대학교에서 48권으로 축소·영인하여 〈고려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해인사목조희랑대사상

 

해인사박물관에 소장된 고려 초기의 초상조각. 보물 제999호. 높이 82cm. 화엄종의 승려로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왕조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던 희랑조사의 모습을 조각한 목조상이다. 이 목조상은 몇 개의 나무를 이어서 만든 다음 그 위에 베를 붙이고 다시 채색한 것이다. 크기는 실제 인체와 같은 등신대(等身大)이나 전체 비례로 보아 상체가 하체에 비해 약간 빈약하게 처리되었다. 긴 얼굴에는 이마·눈가·입주위에 주름살이 새겨져 있고 부드러운 눈매, 툭 튀어나온 광대뼈, 입가의 미소 등에서 인자하고 덕이 높은 고승(高僧)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어깨는 각이 지고 넓은 편이나 가슴이 밋밋하게 표현되어 목부분에 툭 불거진 목젖이 더욱 앙상하게 보인다.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의 꽃무늬가 있는 가사(袈裟)를 입었으며 왼쪽 어깨 위에 띠매듭이 장식되어 있다. 가사 위에 금색이 일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도금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길고 앙상한 두 손은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 가지런히 포갠 채 표현되어 있다. 이 목조상은 얼굴에 보이는 사실적인 표현이나 비교적 균형잡힌 체구와 함께 재료에서 오는 부드러운 조형감 등에서 10세기경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초상조각의 예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해인사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

 

해인사 원당암의 보광전(普光殿)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다층석탑과 석등. 보물 제518호. 높이 석탑 240cm, 석등 200cm. 이 석탑은 탑신석이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특이한 형식의 청석탑(靑石塔)이나 현재 기단·옥신석·상륜부가 결실되어 전체적인 형태를 알 수 없다. 하대석은 크기가 비슷한 화강석으로 3단을 쌓고 그 위에 점판암으로 된 단층기단이 놓여져 있다. 기단의 대석(臺石)에는 복련(覆蓮)의 연화무늬가 조각되었고 그 위의 면석에는 네 귀퉁이에 대리석으로 된 우주(隅柱)를 세웠다. 갑석은 1매의 점판암 판석으로 이루어졌다. 탑신부는 옥신석이 없고 10층의 옥개석만 남아 있다. 옥개석에는 3단의 받침이 얕게 조각되어 있고, 처마는 수평으로 내려오다가 끝부분에서 심하게 위로 올라간 모습이다. 특히 9, 10층 옥개석의 체감률이 급격하여 원래는 그 사이에 또다른 옥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에는 낮은 노반(露盤)과 반구형의 복발(覆鉢)만 놓여 있다. 이 석탑의 전체적인 양식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이러한 청석탑은 신라말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크게 유행했기 때문에 청석탑이라는 재료적인 특성과 다층이라는 형태에 의해서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 옆에는 석등이 있는데 역시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대석과 상대석의 옥개석만 점판암이고 나머지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화사석(火舍石)은 남아 있지 않다. 육각형의 지대석 위에 올려진 하대석에는 12엽의 복련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에 긴 간주석(竿柱石)이 세워져 있다. 상대석 위에는 밑면에 3단의 받침이 있는 옥개석이 놓여 있다.

 

해인사대장경판전

 

해인사 대적광전 뒤쪽 높은 지대 위에 있는 조선 초기의 목조건물. 국보 제52호. 앞면 15칸, 옆면 12칸의 단층 우진각지붕 건물로 그 안에는 고려대장경이 새겨진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가야산해인사고적〉에 따르면 1481년(성종 12)에 개수하기 시작하여 1488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또한 1964년 해체·수리공사 때 발견된 와당 또는 평와(平瓦)에 홍치원년명(弘治元年銘)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은 홍치원년인 1488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높은 계단을 따라 보안문(普眼門)으로 들어서면 크기와 양식이 비슷한 2채의 건물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修多羅藏), 북쪽 건물은 법보전(法寶殿)이라고 한다. 이 두 건물 사이의 양쪽 끝에는 앞면 2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사간판고(寺刊板庫)가 동서로 배치되어 있다. 이 건물들은 낮은 기단 위에 건립되었는데 자연석 주초 위에는 배흘림이 뚜렷한 기둥이 세워져 있다. 기둥의 윗부분은 주심포(柱心包) 계통으로 주두(柱頭)를 올리고 그 위에 대들보[宗樑] 끝을 얹어 그것이 직접 주심도리를 받도록 했으며 그 밑에는 간단한 초공(草工)이 있다.

 

마루보 끝은 대들보 위에 놓인 동자주 위에 놓여 있는데, 매우 간단한 결구방식으로 되어 있고 세부표현 역시 기능 위주이므로 장식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건물의 앞면과 뒷면에는 붙박이 창을 달고 가운데 출입문에는 판자문을 달았는데, 특히 수다라장의 문은 밥그릇을 엎어놓은 둣한 특이한 형태로 뚫려 있다. 붙박이 창은 각각 중방(中枋)을 중심으로 위아래에 배치했는데 앞면의 경우는 아래창이 크고 위창이 작은 반면에, 뒷면은 반대로 되어 있다. 내부는 흙바닥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그 안에 판가(板架)를 세우고 경판(經板)을 얹어 보관했다. 이 건물의 뒤편에 있는 법보전도 같은 크기와 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앞면에 사분합문을 달고 안에 불상을 봉안했다는 점이 다르다. 이 목조건물의 구조는 결구방식이 기능 위주로 복잡한 장식을 가하지 않아 매우 간결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습기를 막기 위한 환기문제를 고려하여 창문의 크기를 서로 다르게 배치하고 판가의 진열장치 등도 과학적으로 설치했다.        - 金理那 글

 

참고문헌

  • 문화재대관 4·5-보물 2·3 : 한국문화재보호협회, 대학당, 1986
  • 한국의 미 16-조선불화 : 중앙일보 계간미술 편·발행, 1984
  • 국보 9 -사원건축 : 신영훈 편, 예경산업사, 1983
  • 한국의 명산대찰 : 국제불교도협의회 편·발행, 1982
  • 명산고찰따라 : 이고운·박설산 공저, 운주사, 1982
  • 한국의 미 7-고려불화 : 중앙일보 계간미술 편·발행, 1981
  • 나려인쇄술의 연구 : 천혜봉, 경인문화사, 1980
  • 한국사찰전서 : 권상로,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 한국의 사찰 7-해인사 : 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5
  • 한국고가람조경연구-특히 해인사조경에 대하여 : 서정임, 형설출판사, 1975
  • 해인사지 : 김설제, 1963
  • 합천해인사지 : 한찬석, 1949
  • 신라하대의 해인사와 화엄종 〈한국사연구〉 49 : 최원식, 한국사연구회, 1985
  • 해인사 목조희랑조사진영(초상조각)상의 고찰 〈고고미술〉 138·139 : 문명대, 한국미술사학회, 1977


 (C) 한국브리태니커회사. 2005,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