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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 로맨스

여여니(여연) 2005. 8. 16. 09:40

 

[이규태코너] 성불 로맨스

 

해인사 법보전의 불상(비로자나불)이 그 뱃속 기록으로 통일신라 말기 한 정승과 그의 연인의 성불(成佛)을 기원해 만들어진 사실을 알고 그 반쪽의 불상을 찾아냈다. 심지어 콧방울 너비까지 똑같은 쌍둥이 비로자나불을 같은 해인사에서 찾아내어, 저승에 가서까지 성불하여 사랑을 이으려는 신라 로맨스가 천 수백 년 만에 드러난 것이다.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시대적 공간적 배경으로 미루어 진성여왕(眞聖女王)과 각간(角干) 벼슬의 위홍(魏弘)일 것이 확실하다.


윈저공(公)이 대영제국의 왕위를 버리고 서민과의 사랑을 선택해 세기의 사랑으로 기억된다면, 신라 진성여왕은 죽고 없는 연인을 위해 왕위를 버린, 이승 저승을 초월한 사랑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여왕은 등극 이전에 유모의 남편인 각간 벼슬의 위홍을 사랑했다. 위홍이 사는 소량리를 드나들었고 위홍도 여왕의 규방을 드나들었다. 반란이 잇달아 나라가 기우는데 사랑에 빠져 망국을 가속시킨 악군(惡君)으로 기록돼 있지만 인간사(人間史) 측면에서만은 재조명되고 구제돼야 할 여왕이다.

 

즉위 2년에 연인이 죽자 대왕으로 추존(追尊)하고 해인사에 그의 원당(願堂)을 짓더니 9년에는 왕위를 물리고 ‘북궁(北宮)에 들어가 그곳에서 죽어 황산(黃山)에 묻혔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적고 있다. 여왕은 위홍이 죽은 후 미소년들을 궁에 들여 그 허전한 정을 달래려 했지만 대리 애정으로는 채울 수 없어 같이 묻히기로 하고 왕관을 벗어던졌을 만큼 농도 짙은 사랑이었다.

조선왕조 성종 때 해인사를 중창하면서 서까래에서 문서 뭉치가 나왔는데 이를 보고 조위(曺偉)가 써 남긴 글에 보면, 신라 말에 해인사를 북궁해인수(北宮海印?)라 했고 진성여왕이 왕위를 버리고 해인사에 든 것은 죽어서 위홍과 같이 묻히고자 원했기 때문이라 했다.

 

고려와 조선조의 불상으로 추정해온 이 쌍둥이 불상의 조성이 신라 말기인 882년으로 위홍이 죽기 전이요 여왕이 즉위하기도 전이다. 곧 둘 사이의 사랑을 너와 나는 하나라는 불교 진리를 구현한 비로자나불로 구상화해 놓은 것이 된다. 현대감각으로 비춰 봐서도 신라 사랑 참 멋지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나온데: 조선일보 2005.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