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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겨-안도현

여여니(여연) 2005. 11. 16. 10:17

 

왕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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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것이야
사랑방 군불로 지펴져도 좋아요.
미끄러운 골목길에 뿌려져
밟히고 밟히다가
그나마 흙 속에 파묻혀도 좋아요.
쇠죽솥 펄펄 끓는 물 속에서
콩깍지에게 구박을 받아도 좋아요.
내 속에서 빠진
한 톨의 쌀
그의 이름이 욕되지 않는다면
까짓 나 같은 것이야
하다못해 이제는 소나 돼지에게마저
멸시받아도 좋아요.                        

 

정영상 시인의 <왕겨>라는 시입니다.

 

전교조 해직교사였던 시인은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병을 얻어 그만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학교에서는 미술교사였으나 시인으로 야무진 시를 많이 남겨 놓았습니다.

 

겨울 초입에서 읽는 그의 시 <왕겨>는 뜨겁고 희생적인 삶을 꿈꾸었던 그의 짧은 일생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 시는 시인의 꿈을 반영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왕겨는 그야말로 빈 쭉정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왕겨는 한 톨의 쌀을 감싸고 있었다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시인도 하나의 속이 꽉 찬 인간을 만드는 왕겨 같은 교사가 되고 싶었을 겁니다. 헌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자기를 버릴 줄 알기 때문이지요.

 

*나온데 : 2005.11.16. 안도현의 아침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