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수상자들

15대대통령 김대중

여여니(여연) 2009. 8. 24. 12:32

 

15대 대통령 김대중

 

정치가 김대중(金大中, 1924.1.6~2009.8.18)은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1998.2~2003.2)을 지냈으며, 한국 민주화와 인권, 남북화해, 동아시아 민주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0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무안군(현재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출생했다. 1943년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 목포일보를 운영했으며, 1952년에는 목포해운회사 사장을 지냈다. 1961년 강원도 인제보궐선거에서 제5대 민의원 의원(현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무대에 진출한 뒤 제6·7·8·13·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6선 의원을 역임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한 뒤 해외에서 유신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1973년 도쿄(동경)에서 ‘김대중납치사건’의 고초를 겪고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다. 1976년에 ‘3·1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미국에 망명, 1985년 귀국한 뒤 해금되자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을 지냈다. 1987년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과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화민주당을 창당,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재차 낙선하였다. 이로써 민주화세력 분열로 인한 군부정권 종식실패에 대한 수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1991년 재야세력을 규합해 신민당을 창당, 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당 공동대표위원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세번째 출마하여 호남지역의 압도적 지지와 수도권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통합여당인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자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한편, 그해 모스크바대 외교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1994년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1995년 정계은퇴선언을 번복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정치활동을 재개하고 당총재를 지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과 의원내각제를 전제로 연대하여 총 투표수의 약 41%를 득표, 39%를 얻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한국 헌정사에서 첫 여야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3차례에 걸친 대권도전 실패와 투옥·망명 등 수많은 시련 끝에 19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선과 함께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자금지원을 받는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정권을 인수,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동시추구를 목표로 국정활동을 펼쳤다. 또한 대북 햇볕정책을 추진하며, 2000년 6월 13일부터 3일간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이산가족 재회와 통일방향을 다지는 ‘남북공동선언’에 서명하였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임기 내내 친인척 비리와 인사편중 시비, 대북 햇볕정책 추진 등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2003년 2월 대통령직을 퇴임했으며, 2006년 2월부터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지냈다. 2009년 8월 18일 서울에서 건강악화로 서거하였다. 장례는 국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98년 무궁화대훈장, 1998년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2000년 노벨평화상, 2003년 만해평화상, 2003년 칠레 대십자훈장, 2005년 독일연방공화국 일등대십자공로훈장 등 많은 을 받았다.

 

주요 저서에는 《내가 걷는 70년대(1970)》 《김대중 옥중서신(1984)》 《공화국연합제(1991)》 《나의 길 나의 사상(1994)》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4)》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1995)》 《대중참여경제론(1997)》 《나의 삶 나의 길(1997)》 《21세기와 한민족(2004)》 등이 있다.

 

*참고자료: 김대중평화센터 홈페이지, 김대중도서관 홈페이지, 인터넷백과, 일간신문기사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