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ys, be Ambitious
for Christ!'
글 : 오소운 목사
미국 메사추세츠 농과대학장이었던 윌리엄 클라크 박사(Dr. William Smith Clark, 1825~ 1886)를, 일본 정부가 농업학교를 만들어달라고 초청하였다. 지금의 북해도대학교의 전신인 북해도농학교의 교두(敎頭, 현 총장)로 특별 초청한 것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1876년 8월 성경을 마흔 권이나 가지고 왔는데, 세관에서 안 된다고 하였다.
클라크 박사는,
북해도대학에 있는 클라크 박사 흉상
"그렇다면 나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고 강경한 태도로 돌아가려 하였다. 당황한 세관원이 상부에 보과하자, 특별초청한 VIP니 통관시키라는 특별 지시가 왔다.
성경을 가지고 북해도 농학교에 부임한 클라크 박사는, 청년들에게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애정으로 지도하다가, 1877년 5월, 9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클라크 박사는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고별인사로 남긴 마지막 말이 다음의 명언이었다.
“소년들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대망(大望)을 품어라.”
'Boys, be Ambitious for Christ!'
그런데 일본의 모든 글들에는 'for Christ' 라는 문구가 빠졌다. 신도(神道)가 국교나 다름 없는 나라이니, 이를 빼어버리는 게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래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for Christ' 라는 문구가 있어야만 말이 된다.
다음 글은 일본 위키피디어(Wikipedia)에서 번역하여 실린 것이다.
'Boys, be Ambitious!'
이 말은 삽뽀로 농학교1기생과 헤어질 때, 북해도 삽뽀로(北海道札幌郡月寒村島松, 現在の北広島市島松)에서 클라크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어구는, 클라크가 떠난 후 한동안 잊혀져 있었기 때문에 후세의 창작이란 말도 한동안 돌았다. 그러나 1기생 오오시마 마사다께(大島正健, 後의甲府中学校, 現 甲府第一高等学校 学校長)가 쓴 한시(漢詩)에「青年奮起立功名」이라는 게 있는데, 이를 번역한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다가 오오시마가 삽뽀로 농학교 창립15주년 기념식전에서 행한 강연에서 인용한 내용을 안도(安東幾三郎)가 기록한 후, 삽뽀로에 있는 1기생에게 확인을 거쳐, 클라크의 말이라고 1894년 경, 동창회지《惠林》13호에 발표하였는데, 그 전문은 'Boys, be ambitious like this old man' 이다….
오오시마는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가 편집하는 잡지, 'Japan Christian Intelligencer, Vol.1, No.2' 에서도 그대로 위 문장을 인용하였다. 한편 'Boys, be ambitious' 는 클라크의 창작이 아니라, 당시 그의 출신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자주 쓰이던 말이라는 설도 있다. 또, 'Boys, be ambitious in Christ (혹은 in God) 라고 했다는 설도 나도는데, 이를 증언하는 1기생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도들의 창작이라고 생각하고들 있다.
위키피디어의 글은 계속 수정되어 실리는 글이기 때문에, 이 글을 믿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필자는 더 많은 웹사이트를 찾아보았다.
아래 글들은 일본 북해도대학 홈페이지를 비롯한 미국의 위키피디어 등에서 간추려 번역한 글들이다. 먼저 북해도대학 홈피의 글을 보자.
─ 명치유신(明治維新) 초기, 일본이 새 나라로 탈바꿈하려던 시기에, 멀리 미국에서 클라크 선생이, 1876년 8월에 와서 삽뽀로 농학교(札幌農学校)를 개교하여, 겨우 9개월 동안 가르쳤다. 삽뽀로 농학교를 창시한 클라크 선생은, 1877년 4월 16일에 귀국할 때, 전별하러 나온 10여명의 제자들에게 마상(馬上)에서,
— Boys, be Ambitious, (for Christ)!
라고 송별 인사를 한 다음, 눈길을 헤치고 달려갔다고 한다. 이 때, 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사람들이 대다수였을 것이다. 만약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클라크 선생에게서 직접 교육을 받은 삽뽀로 농학교 제1기생 오오시마 마사다께(大島正健)가, 마음에 깊이 새겨진 이 말을 기억을 더듬어 널리 전하고, 책으로 써 놓지 않았더라면, 이 말은 사라졌을 것이다.
클라크 선생에게 매료된 오오시마는, 그 후 모교의 교수가 되어 후배들을 가르쳤다.(大島正建 著「クラーク先生とその弟子たち」(教文館)
11명 제자들에게 작별 인사로, 'Boys, be Ambitious for Christ' 하고 말하는 클라크 박사
다음은 미국 웹사이트에서 번역하여 실린 것이다.
─ 1867년부터 77년까지 클라크는 매사추세츠 농과대학의 학장으로 있었는데, 일본정부의 초청을 받아 삽뽀로농학교(현 북해도대학교)를 개교하고, 부학장(vice-president)으로 8개월 동안 근무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과학적 제제(academic subjects in science)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윤리학이란 과목으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의 영향을 받아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클라크가 떠난 후에 입학한 제2기 학생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들 중의 여러 사람이, 그리스도교회, 교육, 국제관계 등의 요직에 나아가, 20세기를 향한 일본의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우찌무라 간조(Uchimura Kanzo)다. 그는 무교회주의의 창시자로서 일본 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 한 사람, 니또베 이나조(Nitobe Inazo)1)는 퀘이커교도로서, 교육가요 외교관으로서 일본에 일려졌다.
1) <주> : 니또베 이나조(新渡戸稲造, 1862~1933)는 최근까지 일본 5,000엔짜리 지폐에 초상이 실린 인물이다.
귀국길에 오른 1877년 4월 16일, 클라크는 전송 나온 10여명의 제자들에게, "Boys, be Ambitious!" 라고 말하였다.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이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강연 때 얘기를 하여 오늘까지 일본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명구가 되었다.
삽뽀로에 있는 북해도청 구본청사에 이 문구가 적힌 액자가 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Boys, be ambitious. Be ambitious not for money or for selfish aggrandizement, not for that evanescent thing which men call fame. Be ambitious for that attainment of all that a man ought to be." (北海道大學圖書館報『楡蔭』No.29收錄)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이 글귀를「쇼넹요, 다이시오 이다께」(Shouneng yo daishi wo itake) 로 인용하지만, 영어 위키피이어는 이렇게 주장한다.
"Boys, be Ambitious for Christ!"
클라크는 진실한 크리스천(clark was a strong Christian)이었다. 그의 제자들 중 거의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던 것이다.
북해도 구 현청사(縣廳舍)에 걸려 있는 액자. 첫줄이 이상하지 않은가? 'Boys, be ambitious, be ambitious' 이 말은 어색하다. 중간에 'for Christ'가 들어가야 말이 된다.
그가 말한 전문은 다음과 같다.
"Boys, be ambitious (for Christ).
Be ambitious not for money or for selfish aggrandizement,
not for that evanescent thing which men call fame.
Be ambitious for (Christ) that attainment of all that a man ought to be."
필자는 위키피디어의 주장에 동의한다. 괄호 안의 문장이 빠졌음을 위의 붉은 글씨를 통하여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Ambitious for ~ what ' 의 문장이다.
'Ambitious for Christ',
'Ambitious not for money',
'Ambitious not for selifish' 라는 문장구도다.
그런데 맨 앞의
'for Christ' 를 빼었으니, 바른 문장이 아니다. 원문 전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소년들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대망(大望)을 품으라.
돈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사리사욕의 확장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명성(名聲)이라는 허망한 꿈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떠한 유능한 인간으로서 살 것인가 하는 대망을 품으라.
오오시마 마사다께 삽뽀로 농학교(札幌農学校) 1기생인 오오시마 마사다께(大島正健, 1859 ~ 1938)는 그의 저서《클라크 선생과 그의 제자들》(「クラーク先生とその弟子たち」, 1937 초판)에서, 클라크가 시마마쓰(島松)에서 한 송별사, 'Boys, be Ambitious, for Christ' 를 온 세상에 퍼뜨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오오시마는 1877년, 클라크의「예수를 믿는 자의 서약」에 서명하고, 유교도로서 예수교를 외국종교라며 완강하게 반대하던 2기생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를 그리스도교로 인도했다. 우찌무라는 친구들과 어느 교파에도 소속 않는 독립교회(오늘의 퀘이커교)를 일으켜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총장 니지마 죠(新島裏)의 협력을 얻어 초대 목사가 되고, 오늘의 독립교회를 세운 것이다.
일본에 카레라이스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 클라크 박사다. 명치5년(1872)까지 일본은 육식을 금지하여, 모든 국민이 왜소(矮小)하였기 때문에 주변 국가에서는 일본나라를 왜국(倭國)이라고 불렀다. 을사조약 직전,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일본을 경유 한국에 들어온《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도서출판 책과함께, 2003)의 기록에 보면,「코레아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다. 또한 신체가 발달하되어 있었고, 균형이 잡혀 있었다.(32쪽). 일본에서는 내가 일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컸으나, 여기(코레아)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사람들은 키가 컸고 체격이 우람했으며..., 그들의 자유롭고 품위있는 태도는 실제보다 그들을 더 커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들이 나를 내려다보는 꼴이 되었는데...,(57쪽)」는 것이다.
클라크 박사는 왜소한 일본인의 체위향상을 위해, 명치정부에서 육식금지가 해금되자 카레라이스를 개발하여 북해도에서부터 보급하였던 것이다. 클라크 박사는 친구 선교사들과 함께 북해도에 포플라나무를 보급하기도 하여 일본에서는 우표까지 만들어 기리고 있다.
클라크 박사 기념우표와 포플라 우표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박사
삽뽀로농학교 제1기생과 교관들 (大島正建 著「クラーク先生とその弟子たち,教文館)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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