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

[김영택의 펜화로 보는 한국] 영주 부석사

여여니(여연) 2005. 5. 18. 14:33

[김영택의 펜화로 보는 한국] 영주 부석사

 

<주간조선 1853호>


자연도 감탄한 ‘단순한 아름 다움’

무량수전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건물로,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에는 꽃살창 하나 없이 단순한 정자살 창호이고 벽면에는 벽화도 없습니다.
지금은 단청도 씻겨나가 나무 맨살 그대로입니다.

▲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浮石寺)는 산속 아늑한 분지에 있는 여느 절과 달리 산비탈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풀 먹인 삼베옷처럼 뻣뻣한 듯하면서도 구석구석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376년 중수된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나라 안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서 부석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그동안 많은 분이 언급을 하였기에 몇 가지 특징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부석사 봉황알.

 

우리 건물의 특성 중 하나가 보는 사람 위주로 지어졌다는 점입니다. 즉 건물의 정면에서 건물 높이의 2배쯤 떨어진 곳에서 보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큰 법당으로 우리 건축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지붕 용마루의 가운데가 낮고 좌우로 가면서 높아집니다. 용마루를 수평으로 만들면 지붕이 좌우로 처져 보이는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일반 가옥은 용마루가 수평입니다만 우리는 가옥에도 곡선을 이용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무량수전의 가운데 기둥은 낮고 귀퉁이로 갈수록 높아집니다.

 

그래서 문 위의 창방이 좌우로 가면서 약간씩 올라갑니다. 워낙 자연스러워서 알고 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귀솟음’이라고 합니다.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이 유명한 이유는 선이 곱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둥이 모두 수직이 아니라 건물 안쪽으로 기울게 세워진 것을 아시는 분은 적습니다. ‘안쏠림’이라 하는데 건물이 튼튼하고 안정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귀퉁이 쪽의 처마를 더 길게 하여 처마선을 곡선으로 만든 것은 ‘안허리곡’이라고 하고요.

 

이러한 수법들은 집을 지을 때 까다롭고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조상들은 왜 힘든 방법을 택하였을까요. 답은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 건물을 짓고 그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 부석사 법고와 목어.

▲ 부석사 안양루와 소백산.

무량수전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건물로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에는 꽃살창 하나 없이 단순한 정자살 창호이고 벽면에는 벽화도 없습니다. 지금은 단청도 씻겨나가 나무 맨살 그대로입니다. 이런 무량수전을 한국 건축의 백미로 꼽는 것은 ‘단순명료한 아름다움’이 ‘화려한 아름다움’보다 훨씬 윗길이기 때문이지요. 일본 공예의 아름다움과 한국 공예의 아름다움을 비교하여 ‘게이샤의 아름다움’과 ‘맏며느리의 아름다움’으로 구분짓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큰 인물 나는 곳” 일제가 철거

법당 안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 한 분이 협시보살도 없이 혼자 계십니다. 흙으로 만든 소조불(塑造佛)로 금을 입혔고 나무로 만든 광배의 불꽃 조각이 사실적이면서도 화려하여 법당 안에 금빛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흔하게 듣는 ‘나무아미타불’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아미타’란 ‘무한한 수명과 자비와 지혜를 가진 자’라는 말이며 ‘나무(南無)’는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은 ‘무한한 생명과 지혜를 지닌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무한한 수명을 지닌 아미타부처님을 모셨기 때문에 법당 이름을 ‘무량수전’이라고 붙인 것이지요.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이고 아미타여래좌상은 국보 제45호입니다. 무량수전 앞에 있는 아름다운 석등도 국보 제17호입니다. 석등 앞에 안양루가 소백산맥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연봉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어 해질녘 안양루(安養樓)에서 보는 낙조는 일품입니다.

 

소백산의 연봉들이 머리 숙여 절을 하는 새들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무량수전 터를 군조조봉형(群鳥朝奉形)이라고 합니다. 또한 봉황이 알을 품은 자리라 하여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이라고도 부르며 자손만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이며 창고 문이 열려있어 재물이 풍성한 자리랍니다.

 

그래서인지 부석사는 재산이 넉넉하답니다. 근래에 무량수전 서쪽 비탈에 화강석으로 만든 알 3개를 배치해 놓았기에 스님께 물어보았더니 모 대학 교수가 “봉황의 알이 있어야 되는 곳”이라며 자비로 만들어 놓았답니다.

 

무량수전 동쪽 뒤편에 부석사를 세운 의상(義湘) 스님을 짝사랑하다 죽어서 용이 되어 대사를 위하여 활약을 하였다는 선묘(善妙) 낭자를 모신 선묘각이 있습니다. 뒷산에는 조사당(祖師堂), 응진전(應眞殿), 자인당(慈忍堂), 단하각(丹霞閣) 등 작은 건물 여러 채가 있습니다.

 

조사당은 국보 제19호로 의상 대사가 수도하던 건물로, 1366년 원응국사가 중건하였고 성종 21년(1490)에 중수하여 무량수전과 나이가 같습니다. 조사당 벽화는 일본인들이 벽째 들어내 일본으로 반출하려다가 해방이 되는 바람에 부산에서 되찾아온 귀중한 유산입니다. 유물 전시각에 전시해놓았는데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물 전시각에는 무량수전 부처님의 머리 위 닫집에서 부처님을 수호하던 용이 오랜 임무를 끝내고 전시되어 있는데 보기드문 걸작입니다. 한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몸을 이리저리 휘감고 머리를 쑥 내민 모양을 4장의 판목을 꺽쇠로 붙여서 만들었습니다. 머리 부분과 구름 등은 별도로 만들어 붙여놓아 입체적인데 조각 솜씨가 뛰어나고 조형미가 매우 우수합니다.

▲ 부석사 삼층탑.

▲ 부석사 석축.

조사당 옆 취현암(醉玄菴)은 사명대사가 수도하던 곳으로 큰 인물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1916년 일제가 무량수전을 보수하여 주는 조건으로 철거하였는데 1999년 다시 지어 선원에서 사용한답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명산의 혈에 쇠말뚝을 박고 지맥을 잘라서 조선의 정기를 죽이려 하였던 것은 영원토록 조선을 자기들의 땅으로 만들어 놓아 지진으로 일본이 물에 가라앉아도 국가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한 것이랍니다. 꿈도 참 야무졌지요.

▲ 부석사 목조용.

부석사에서 눈여겨 볼 것 중 하나가 돌로 쌓은 석축입니다. 돌 모양에 맞추어 치밀하게 쌓은 솜씨는 나라 안에서 최고로 천 년 이상을 버텨온 비결입니다. 요즈음 쌓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분명 보고 쌓았는데도 따라갈 솜씨가 없나봅니다. 특이한 것은 9줄의 석축이 나란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지형에 맞추어 쌓았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인위적 요소를 최소화하고자 하던 조상의 지혜입니다.

 

부석사에는 국보 5점과 보물 4점이 있어 나라 안에서 두 번째로 중요문화재가 많은 절입니다. 가까운 소수서원과 성혈사도 일정에 포함시키면 알찬 답사여행이 됩니다. 성혈사 나한전에는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살창이 있습니다.

 

그림ㆍ글ㆍ사진=김영택 펜화가(honginar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