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

불교사찰, 산중떠나 대도시로-우학스님

여여니(여연) 2006. 9. 21. 10:10

 

불교사찰, 산중 떠나 대도시로 가야

 

<문화일보 2006/9/7/목/기획19면>

 

대국 영남불교대학·관음사 회주 우학 스님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1. 우학 스님이 회주(會主·법회를 주관하는 사람. 해당 사찰의 최고 실력자인 경우가 많음)로 있는 영남불교대학·관음사의 명칭에는 특별한 수식어가 붙어 있다. 그냥 영남불교대학·관음사가 아니라 영남불교대학·大관음사다. 大관음사는 대구 관음사의 줄임말이기도 하지만, 큰 절이란 의미가 더 강하다. 이 수식어에 어울리게 이 절은 전국의 불교 사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대구시 남구 봉덕3동 대로변에 자리잡고 있는 이 사찰의 연건평만 5000여평. 수십개 전각을 모두 합쳐도 2000평에 훨씬 못 미치는 통도사나 해인사, 송광사보다 연건평이 2배 이상 넓은 셈이다.

이 건물에는 크고 작은 법당과 강당을 비롯해 수행관, 학림(강원), 선방, 출판사, 방송스튜디오, 신협, 어린이집, 보건실, 사진관, 갤러리, 도서관, 박물관, 서점, 꽃집, 찻집, 우리옷 판매장, 불교용품백화점, 생태공원, 노인전문병원, 내생체험관, 극락당(납골당) 등 온갖 시설이 들어서 있다. 불교타운의 인드라망적 완성을 목표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논스톱 시스템, 신개념의 도심 총림, 전통과 첨단의 완벽한 조화 등을 구호로 내건 사찰답다. 이뿐 아니다. 경북 경산과 칠곡에도 적잖은 규모의 법당이 있고, 경북 감포에는 스님 선방인 무문관이 있다.

이렇게 많은 사찰의 각종 시설들 가운데, 놀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10만명이 넘는 신도들은 시간만 나면 절로 나와 수행을 하거나 공부를 한다. 기자가 절을 찾은 지난 4일(월요일) 낮만 해도, 크고 작은 법당과 도서관, 수행관 등에는 독경이나 사경(寫經·경전을 베껴 쓰는 수행), 참회 기도나 참선 중인 신도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서점이나 출판사, 찻집, 갤러리 등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흔히 고요한 곳을 일컬어 ‘절간 같다’고 하지만, 이 절은 절간의 개념을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절을 일으킨 우학 스님이 뭘 어떻게 했기에 절이 이런 활기로 넘치는 것일까. 지난 4일 오후 노인요양원 상담사 수료법회를 마친 뒤, 상기된 표정이 가시지 않은 스님을 이 사찰 안의 갤러리에서 만났다.



#2. 스님이 영남불교대학·관음사를 연 것은 1992년 5월15일. 대구시 남구청 앞 4층짜리 건물의 맨 꼭대기층 70평을 보증금 3000만원, 월세 50만원에 임차한 허름한 공간에서였다.

“동안거를 마친 뒤 걸망 하나 짊어진 채 대구를 지나다 불교 포교당이 망해 다른 종교의 간판을 내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건 안 된다’는 불제자의 오기가 발동하더군요.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내가 한번 해보겠다’며 나섰지요.”

문제는 돈이었다. 참선이나 하던 선객에게 보증금과 월세를 낼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보증금을 구하기 위해 돈을 빌리다 못해 속가의 부모 형제까지 찾아 손을 벌렸다. 여기에다 동안거를 마치며 받은 돈 127만원을 쪼개, 50만원은 월세로 내고, 50만원으로 복사기를 구입했다. 남은 돈 27만원으로는 플래카드 10개를 만들어 대구 시내 여기저기에 내걸었다. 플래카드의 내용은 ‘영남불교대학 신입생모집’.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첫 개강 때 120명의 수강생이 몰려들어 법당을 꽉 채웠으니까요. 남은 것은 제대로 가르치는 것뿐이었습니다. 1시간을 가르치기 위해 10시간 이상 연구하고, 준비하며 강의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플래카드를 내걸 필요도 없었다. 매달 새로운 수강생을 모집할 때마다 법당이 넘쳤다. 강의가 거듭될수록 노하우도 축적됐고, 처음 엉성하던 교육 과정도 빠른 속도로 자리를 갖췄다. 쉽고 재미있더라, 허공의 구름잡는 이야기는 하지 않더라, 듣고 나니 뭔가 각성이 되고 생활이 변하더라…. ‘우학스님 잘 가르친다’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강의나 법문보다 중요한 것은 스님 자신의 수행경험을 바탕으로 한, 교선일치(敎禪一致)의 실천이었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불교 강의를 수행과 연결짓는 것입니다. 경전을 가르쳐 신도들의 의식이 깨어난다 하더라도 수행이 없으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경전을 공부해 길을 알았다면 그 길을 직접 걸으며 수행의 참맛, 참선의 재미를 느껴야지요. 영남불교대학과 관음사가 둘이면서 둘이 아닌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행의 최종 목표는 깨침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 프로 수행자인 스님도 깨치기는 지난한데, 생활에 바쁜 일반신도가 짬짬이 하는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드시 확철대오하는 것만이 수행의 목적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가중된 업무와 스트레스, 이기심과 고독 등으로 지쳐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교 수행은 나의 진면목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무엇이 참된 삶이냐를 근원적으로 파고듭니다. 그러니 현대인의 자기 성찰과 행복 증진에 불교 수행만한 것이 없는 셈이지요. 특히 학생과 직장인들의 집중력과 창의력 향상, 정신 건강 증진에 참선만한 것도 흔치 않습니다.”

영남불교대학·관음사가 가르치는 수행법에는 참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염불, 독경, 사경, 절 수행 등 한국 불교 전통 수행법은 말할 것도 없고, 남방불교나 티베트 불교의 수행법에도 마음을 열었다. 특히 간화선과 위파사나의 장점을 취한 선관쌍수(禪觀雙修) 수행은 이 절에서 강조하는 수행법 중 하나다. 이렇게 공부와 수행의 병행을 외치며 절을 이끌어 온 지 약 15년, 절의 규모는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 사이 1년 과정의 교육을 수료한 신도는 10만명을 넘고, 10년이 걸리는 교육과정을 이수한 신도만도 4000명에 이른다.



#3. 마치 벤처기업의 성공담을 연상케 하는 스님의 영남불교대학·관음사 창건 성공은 얼핏 보기에 운이 좋았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운만으로 이런 대규모의 사찰을 일굴 수는 없다. 요컨대 스님은 알게 모르게, 성공적인 도심 포교당을 일굴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경북 경주 불국사 인근에서 한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난 스님이 통도사로 입산한 것은 모대학 한의예과를 한 학기 마친 뒤. 고교 시절 숙부의 갑작스러운 별세에 충격을 받아 한의예과에 진학했으나 한의학으로는 삶과 죽음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전 조계종 종정)의 손상좌로 계를 받은 뒤, 강원에서 2년간 공부하던 그는 강원보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어 동국대 선학과로 진학한다. 동국대 선학과에서 이론을 배우다 보니 실참 수행이 필요하다 싶어 선방을 찾았고 선방에 있다 보니, 다시 강원 공부가 필요하다 싶어 강원으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강원과 대학, 선방을 전전하다 보니 강원과 대학을 마치는 것에 남들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릴 수밖에. 그렇다고 시간을 허비한 것만도 아니었다. 불교의 공부란 게 수행과 불가분의 관계인 탓에 강원·대학과 선방·토굴을 오가며 공부한 것이 결과적으로 스님이 오늘의 사찰을 일구는 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남불교대학·관음사에서 공부와 수행의 병행을 강조하는 것만 해도 자신의 경험과 관계가 깊다. 절 운영과 각종 법회의 법문, 강의, 집필 등으로 눈코 뜰새없이 바쁘면서도 스님 스스로 해마다 한번씩은 3개월씩의 선방 안거를 거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포교도 수행과 따로 놀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한국 불교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스님은 한국 불교가 산중에 머물 경우 희망이 없다고 단정한다.

“부처님이 세운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나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물며 가르침을 편 기원정사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죽림정사는 마가다국, 기원정사는 코살라국의 수도에 있었습니다. 불교가 살아남으려면 대중이 많은 곳에 자리잡고 대중을 안고 가야 합니다. 영남불교대학·관음사를 인구가 많은 대도시에 세운 것도 보다 많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자는 취지지요.”

이와 함께 스님은 기존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는 파격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평범한 중생이 깨침을 얻어 부처가 되는 파격이 가능한 것이 불교입니다. 그러나 조계종은 행자에서 대덕에 이르는 교육체계와 법계품수를 지나치게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주지가 되려면 승랍이 몇년이 돼야 하네, 몇 안거를 성만해야 하네…. 물론 어느 정도의 필요성은 인정합니다만, 문제는 우수한 인재가 다 썩는다는 겁니다. 정치 입문 10여년 만에 대통령이 되고, 정치 신인에 해당하는 사람이 수도 서울의 시장이 되는 세상입니다. 능력이 되면 승랍이 다소 모자라도 걸맞은 일을 맡겨야지요.”

스님이 행자를 받아들여 직접 승려 양성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적어도 자신의 절에서는 파격을 해보자는 것이다. 현재 이 절에서 행자생활을 하는 예비승려는 14명, 이 절에서 행자를 마친 뒤 승려가 된 사람은 약 50명에 이른다.

“앞으로 국내외에 1000개의 분원을 세울 겁니다. 문제는 이를 세우는 데 엄청난 자원, 즉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타성에 젖어 자기만 생각하는 기존의 승려로는 곤란합니다.우리 절의 행자 교육은 불교 공부와 수행 외에 사회복지와 봉사 등 대사회 활동을 제대로 경험케 한다는 점에서 다른 절의 교육과 다릅니다.”


#4. 1000개 분원이라…. 스님은 “어렵지 않다”고 강조했다. 우선 10년 안에 200개를 세우면, 나머지 800개는 훨씬 쉬워질 거라는 이야기였다. 이들 사찰이 중심이 돼 수행과 교육, 문화, 복지에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무기력 상태에 빠진 한국 불교에 충격을 주면서 세계불교로 거듭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종내는 현대사회에서 불교가 감당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해 내겠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혁신을 바탕으로 이웃과 나를 둘로 생각하지 않는 보살심,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요, 불교의 나아갈 길입니다. 영남불교대학·관음사는 이를 위해 세워졌고, 끝까지 그 길로 나아갈 겁니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우학스님 약력

▲통도사 입산 ▲성파 스님을 은사로 득도 ▲강원 및 동국대 선학과 졸업 ▲제방 선원에서 정진 ▲영남불교대학·관음사 회주 ▲‘저거는 맨날 고기 묵고…’, ‘새로운 불교 공부’, ‘마음을 밝혀주는 새 법구경’, ‘불교적 해석의 명심보감’등 저서 70여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