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

아름다워라 고려불화여-유홍준

여여니(여연) 2005. 6. 21. 10:20

 

‘아,  아름다워라 고려불화여’
‘아, 아름다워라 고려불화여’는 이동주 선생님께서 한국일보에 ‘일본 속의 한화’라고 하는 것을 연재하는데 어느 날 쓴 제목이 ‘아, 아름다워라 고려불화여’였습니다. 그 인상이 하도 깊이 박혀 이 이야기를 썼습니다.

고려불화는 80년 무렵부터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일제시대 때 고유섭 선생님이 쓴 조선시대에 조선 미술사 및 미학논고 속에서 나온 글을 보면 고려시대 화적에 대해서 고려시대 때 그림에 대해서라고 쓴 글이 있는데, 그 글 속에 ‘고려불화’라고 쓴 것은 지금 ‘센소지 아사쿠사테라’라고도 하고 ‘센소지’라고 하는 일본의 천초사에 소장돼 있는 해효스님이 그린 ‘수월관음도’ 물방울관음이라고 하는 그림 한 점이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부석사의 벽화’ 뭐 ‘수덕사의 벽화’하는 이런 이야기들만을 또 전해들은 이야기들만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고려불화가 ‘아름답다’거나 ‘국제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문헌 기록에서는 봤어도 실물로서는 본 일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일본에 ‘구마가이’라고 하는 사람이 조선 학보라고 하는 일본에서 나오는 한국화 논문지에 67년에 ‘조선불화집’이라는 논문을 발표합니다. 여기에서 이 분이 고려불화하고 조선 초기 불화 합쳐서 70점이 일본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소개합니다. 그 중에는 잘못 들어온 것이 몇 점 있긴 합니다마는 어쨌든 깜짝 놀랄 사실을 발표를 하게 됩니다.

고려불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수월관음도’라고 하는 건데 원나라 때 ‘장사공’이라고 하는 화가가 불화를 잘 그려서 전부 ‘장사공 관음’이라고 불러왔는데, 일본에서 원나라 때 장사공이 그렸다고 하는 불화는 전부다 고려불화라고 하는 그러한 취지에 글로써 쓰게 됩니다.

그래서 그걸 계기로 해서 73년에 이동주 선생이 일본 속에 한화를 찾아가는 탐방기를 한국일보에 연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78년에 일본 나라에 있는 야마도 군가깡에서 고려불화 특별전을 열게 되는데, 이 때 처음으로 고려불화가 일반인들에게 보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전시회였고, 그 때 52점의 ‘탱화’하고 17점의 ‘사경변상도’가 출품 되어서 고려불화에 대해서 아주 대대적인 센세이셔널한 각광을 받게 됩니다.


78년 일본 고려불화 특별전 계기로 각광 받기 시작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고려불화는 대개 탱화를 이야기 하는데 여러분들이 절에 가서 보는 탱화하고는 달리 120~180정도의 높이에다가 폭이 120~100 정도 되는 두루마리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족자 그림으로 된 작은 그림들입니다. 그래서 고려불화 중에서 탱화가 갖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의 사찰 중에서도 어떤 특정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또 하나는 150점정도 되는 그 고려불화 중에서 이것은 확실히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다하는 연도와 제작자를 확실히 아는 것이 20점 정도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거에 근거해서 지금 고려불화가 양식으로 해서 많은 것들이 규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불화 연구 되다가 작품을 찾다가 주춤하게 된 것은 고려불화에 본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송나라 원나라 때 불화의 사정이 아직까지 확실하게 연구가 되어있지 있습니다.

고려불화는 몇 점을 제외하고는 전부 14세기 1300년~1350년 사이에 만들어졌습니다. 1270년 무렵에 만들어진 일본은행 소장돼 있는 것이 시대가 빠른 편이고 나머지 1300년~1350년이니까 원의 대원제국 간섭기에 받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 권문세족들이 원당에다가 안치하기 위한 특수한 형식으로 나온 것이 고려탱화가 아닌가라는 것이 지금 미술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왜 일본에 그렇게 많이 갔는가? 그것은 당시부터 일본 사람들이 와서 고려불화를 원해서 사실상 주문 생산에 의한 수출품이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왜구들이 가져간 것이 상당히 많습니다. 왜구들이 남쪽지방에 와서 떼어간 것들이 예가 있고, 그 다음에 임진왜란 때 가져간 예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제시대 때 모든 것을 다 가져갔다고 그렇게 우리가 지금 이야기 흔히 쉽게 얘기하면 그렇게 얘기하는데, 실제로 고려불화의 경우에 과연 일제시대 때에 약탈을 하듯이 가져간 것이 구체적으로 뭐가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일본 사람들 일본에 그래서 전례 되는 게 있는 게 전부 교토를 중심으로 한 명찰들이 갖고 있거든요? 지운원이라든지 교토에 가면 우리가 관광으로 가는 서복사 같은 그러한 큰 절에 갖고 있는데, 일본과 우리나라가 문화재뿐만 아니라 물건을 간수하는 데 있어서 큰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 큰 차이 중에 하나가 우리는 쓰다가 망가지면 확 버리고 새로 만들잖아요. 집을 지어도 그냥 싹 헐어버리고 새로 짓는 것과 똑같이.

조선시대 때 그 영정 초상화 좋은 것들 제사 지내면서 쓰다가 그 다음에 100년, 200년 쓰면 벌레가 먹고 습기가 차서 떨어지게 되면 새로 이모본을 만듭니다. 이모본을 만들면 앞의 것을 놔둬야 되는데 대개 그것은 불태워 버립니다. 우리도 태극기 구겨지면 다 불태워 버리라고 그러잖아요.


한국은 낡으면 이모본 만들고 옛 것 태우지만 일본은 고쳐 써



그런데 일본은 절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고쳐서 써오는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되도록이면 손을 안 대는 전통을 갖고 있었어요. 어쩌다가 일본에서 한 지금부터 한 3~400년 전에 개치를 한 것들이 있습니다. 더 이상 박락돼서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 그렇지 1300년 무렵에 만든 것이면 지금 700년 전에 만들어진 그림입니다. 그것도 비단에다가 그려진 것인데, 그 색감이 지금 그대로 전달된다고 하는 거는 엄청난 일인 겁니다. 보존과학상으로 봤을 적에는.

또 한편으론 그런 게 있어요. 일상적으로 우리가 쓰는 것은 그냥 막 쓰면서 외국에서 뭐 갖고 온 것은 귀하게 우리가 쓰는 습관이 있잖아요. 일본인들에게 똑 같은 것이었거든요? 최근 100년 사이에 역전이 돼서 그렇지 지난 2000년 동안 일본 사람이 한국을 생각한 것은 우리가 지금 불란서 생각하는 정도로 생각을 해 왔던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 문명이 발달된 나라의 최고급품을 갖고 왔다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간수를 해 가고 거기다 감히 손을 못 대게 해 왔던 그러한 측면이 한편에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에 관계되는 미술품으로 제일 먼저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이 ‘사경이’죠. 지금 호암미술관에 있는 755년에 만들어진 백지에다가 묵서로 써 놓은 ‘대방광불 화엄경’이 이런 둘둘 말은 두루마리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경을 쓰는 형식이 나중에는 이렇게 아코디언 식으로 첩으로 됐는데 첩으로 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11세기 넘어가서의 일이고, 11세기 이전에는 이렇게 둘둘둘둘 말았습니다. 권축으로.

그랬는데 지금부터 한 30년 전에 어디에서 이 뭉치가 그냥 종이가 바깥에 있는 것이 거의 낙엽처럼 바스러진 상태 속에서 출현을 하게 됐습니다. 저 글 속에 화엄경을 쓴 것보다 저기에 오자가 없거든요? 거기에 한 자라도 틀림이 없게 하기 위해서 한 자를 쓰고 향을 태우고 삼배를 드린 다음에 다음 글자를 썼다고 그럽니다. 이거 삼보일배 정도가 아니에요. 그니까 세 번 삼배를 해야지 한 글자를 쓰는 그 정성으로 이 경을 만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 경을 이렇게 만들면 경을 쫙 펴게 되면 맨 앞에는 그 경을 수호하는 의미의 사천왕이라든지 제석천, 범천 같은 수호신 상을 그리고, 이 바깥쪽에는 보상당초화문을 갖다가 문양으로 넣어서 이렇게 굴렸는데, 이게 기적적으로 살려서 겉표지에 나와 있는 것이 속에 지금 설법하고 있는 모습의 광배가 있고 보살이 둘러 있는 이런 모습들이 그림이 이만큼을 남았습니다.

또 이것에 뒷면있죠. 이 뒷면은 표지 두루마리에 있었던 보상당초화문이 이와 같이 꽃 그림들이 지금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11세기 대보적경이라고 하는 이 경전에 두루마리 처음에는 옆으로 이렇게 펼쳐지다가 맨 마지막에 가면은 여기에 ‘통화 24년에 만들었’다고 써 놨는데, 이거 보면 얼 만큼 정성이냐면 첫 번째 교정은 누가 봤고 두 번째 교정은 누가 봤다라고 하는 것까지 써 있죠. 종이는 떨어져 나갈지언정 금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사경들을 보여주는데, 이와 같은 사경도 처음에는 우리에게 몇 점 없었어요. 그랬는데 일본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것들이 지금은 호암미술관하고 호림미술관을 중심으로 해서는 상당히 많은 숫자는 다시 오지 않았는데 옛날에는 그것 하나 있으면 무조건 보물로 다 지정을 했었는데 지금은 다 그것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후 12세기를 넘어서게 되면 이게 아코디언 식으로 이렇게 절첩으로 돼 있는 거에 표지는 지금 없고, 절첩으로 돼 있는 걸 펴면 맨 처음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법화경, 묘법연화경 전 7권으로 돼 있는 거나, 아니면 대방광불화엄경 80권 본을 써 놓은 것이 두 가지 유형으로 있는데, 이와 같은 것을 화엄경 80책을 놓은 다든지 아니면 법화경 7책을 잘 정말로 금물로 잘 써서 같이 간직한다고 하는 것이 종교적인 의미하고 또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서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고려시대 때 금사용을 금지하는 일이 있는데 그 때도 사경을 하는데 있어서는 예외를 두었으니까 지금 그렇게 많은 것들이 나오고, 금물로써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이 책 내용 전체를 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도상이라기보다 그냥 설법하고 있는 그 장면으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여기에는 금강절을 뒤로 돌리는데. 묘법연화경 제 6권 변상, 변상이라는 것은 글 내용을 그림으로 바꿨다라고 해서 변상이라고 하는데. 이 사경들 보면 맨 처음에 대방광불화엄경이건 묘법연화경이건 맨 앞에 쓸 적에 이렇게 괄호 표시를 두 개를 합니다.

가로 표시를. 그런데 괄호 표시는 뭣 때문에 하는가 몰랐는데, 저게 범어로 ‘옴마니밧메훔’ 할 적에 옴자를 변형을 시켜서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신묘장구대다라니 스님들 독성할 적에 보면 ‘옴아라남 아라다’ 할 적에 옴자는 항상 강조해서 주는 것이 이 마귀를 쫓는 다고 하는 ‘옴마니밧메훔’ 할 때도 옴에다 쓰는 것이 있으니까 이것이 ‘정구업진언’이라는 그런 뜻이나 마찬가지로 모든 제액을 다 물리치고 그 다음에 이걸 쓴다하는 그런 일종의 사인의 역할을 했습니다.


제대로 된 경전에는 제작 의도 적은 발언문 적어



그러니까 제대로 된 경전을 보면 이름을 쓰기 전에 옴자를 이렇게 써 놓는 것이 앞으로 보시는데도 계속해서 나올 겁니다. 그런 중에 대방광불화엄경 31권 변상 이렇게 써 놓은 것이 그게 옴자고 여기 중간테두리는 금강절을 돌렸고, 여기에다가는 발언문을 집어넣는 경우가 이게 호암미술관 소장품인데 여기에 이 경전을 만드는 거가 ‘시주사가 이런 뜻으로 해서 했습니다’라고 하는 그 발언문을 넣어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이제 우리로서는 제작 동기를 낳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알기 때문에 더욱 반가워 지는 건데, 이 경전을 아무나 시주를 해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경이 아무나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중에 법화경 보탑도라고 하는 이 그림이 참 끔찍스러운 작품입니다. 이 고려시대에 대해서 우리는 이상할 정도로 문화능력에 대해서 약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삼국시대나 통일신라는 굉장히 높이 보고 금관이라든지 석굴암 같은 것을 하면서 고려시대의 겨우 청자 정도만 이야기하고 그 시대 문화 자체가 얼 만큼 컸는가에 대해 가지고서 우리가 간혹 가다가 빠트리는 수가 있습니다.

고려불화는 그 당시에 세계 문화사 속에서 당당히 1등한 품목입니다. 그것을 만들어 냈던 고려문화가 고려시대의 공예작품이 얼만큼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치밀했는가 하는 거는 이 보탑도 법화경 내용을 이렇게 7층 석탑 7층 목탑을 이렇게 그려놓은 것 같지만 그린 게 아니라 이 끝에서부터 이 끝까지 읽으면 아까 말한 7권으로 된 법화경이 다 이 글씨가 이 속에 다 들어있어요.  

이 지붕골로 내려 와서 풍경으로 내려오는 게 이게 다 글씨잖아요. 이게 전부다가. 여기에 있는 이것만 그림이고 옆으로 퍼져 있는 것만 그림일 뿐이고... 이 옆에 풍경이나 또 옆에 비천상이 나는 것 이것만 그림이고 이 탑의 몸체에서부터 풍경까지는 전부다 글씨에요. 이게 기왓골에 내려온 것들 여기 중간 중간에 화불들을 그려 놓습니다만 이게 이 글자를 다 읽으면 마지막에 가서 법화경이 끝나는 거예요. 야! 이것은 뭐 어떻게 설명을, 이 끔찍한 작업을 어떻게 기획을 해 가지고 서는 글자를 배분해서 했는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한국인이 하는 것에는 그런 스케일이 크거나 정미한 것이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한테는 이 작품을 보여주면 그거 한 마디로 아마 꺾어질 거예요... 그 옆에 그런 정성의 문화를 만드니까 옆에 있는 비천상을 그리는 선들도 이렇게 아주 유려하고 당대 회화가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마는 당시 회화 역량을 유감없이 볼 수 있지요.

사실 그만한 역량이면 부석사나 수덕사 같은 고려시대 절에 일부 남아있는 그 벽화들, 그것이 조선시대 때 폐불 정책을 쓰지 않았으면 우리가 이데올로기의 대전환이 이루어져 버렸거든요. 조선시대 때. 그러니까 앞 시대에 가서 만들었던 것들을 파괴하는 것을 거의 일삼아서 해 왔기 때문에 불화가 남아 있을 수가 없어가지고, 간수도 안했으니까 남지 못해서 사라졌는데 그 중에 부석사 조사당에, 이 조사당에 벽화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벽화는 결국 떼어서 유물 보관동으로 옮기고 지금은 20세기의 새 불화를 그려서 장식을 하고 있는데. 이런 본래 벽화의 전통은 이렇게 따로 있었던 겁니다. 이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수리하다가 그 안쪽에서 이와 같은 꽃꽂이 해 놓은 그 그림이, 꽃그림이 장식화로서 발견이 됐습니다. 이런 벽화의 전통에 대해서는 우리는 지금 아는 바가 없고, 나중에 무의사 벽화를 보면서 조선초기의 벽화를 보면서 ‘아! 고려시대의 벽화가 이렇게 이런 수준이었구나’라고 하는 것을 역추적을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고려불화는 이와 같은 시기에 지금 확대를 해서 슬라이드가 확대될 수밖에 없습니다마는 이런 족자스타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도상은 전부 아미타신앙과 관계되는 것으로 구복신앙에 관계되는 것으로서는 국한이 되어 나옵니다.

‘아미타여래상’,  수월관음이라고 하는 ‘관세음보살상’, 그 다음에 ‘지장보살도’ 그것이 대종을 이루고, 그 다음에는 ‘정토삼부경’이라고 하는 경중에 하나인 ‘관무량수경변상도’ 그 다음에 또 미륵상생경이 아니라 ‘미륵하생경’ 미륵이 중생을 제도해가는 과정을 설명한 ‘미륵하생경’. 전부 구제신앙, 구복신앙에 해당하는 것들도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아미타여래상을 그리는 것은 극락세계 주재하시는 분으로 ‘단독상’, 그 다음에 관음과 세지보살을 거느린 ‘삼존상’, 그 다음에 8대 보살을 거느린 ‘구존상’ 이것이 좌상과  입상 이렇게 6가지 형식으로 나오는 당대의 인기품목이었습니다.

이런 상태로서는 별 감동을 받기 힘들지만 아까 본 그림의 가운데 있는 ‘보상당초화문’의 그림이 이와 같은 필치였습니다. 그리고 옆에 군상 속치마에 들어 있는 초록색 그림에는 구름 문양이 그려있는데, 어디서 많이 봤죠? 고려청자에 나오는 그 구름 문양을 이와 같이 속으로 해서 넣었던 겁니다.

이 밑에 군상이라고 하는 속치마에 운학문이고 여기에 있는 것이 이 보상당초화문으로 넣었는데, 보상당초화문 이 작품이 14세기가 아니라 13세기에 그려진 일본은행에 소장돼 있는 이것이 고려불화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성격 중에서는 조금 예외적인 데가 있습니다. 도상 자체도 그렇고 문양이 그렇습니다.

이후에 보이는 고려시대 문양은 이 연꽃 문양이라고 하는 거가 이거는 지름이 17센티 되고 그림이 원화 디자인화 하기 이전에 원단의 느낌이 많이 남아 있어요. 그런데 그 이후가 되면 완전히 연꽃과 국화꽃 또는 모란꽃들을 변형을 시킨 걸로 바뀌어서 다시 얘기해 가지고 이 작품에서는 불교가 갖고 있는 팔매특교화라는 보상당초화 그 자체를 그렸던 것이 이 이후 한 30년 지나고 나면 전부 고려식으로 만들어진 문양으로 바뀐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게 됩니다.

이 고려불화도 불화 중에서 구름 문양도 지금 이렇게 청자도 마찬가지에요. 청자에서는 오두음 무늬라고 했죠. 머리가 다섯 개 있는 건데, 이것은 머리가 세 개 있는 것으로 이렇게 동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저게 지렁이처럼 이처럼 기어가는 걸로 타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옆에 보이는 것이 이 좌대의 모습이었고. 그 고려불화 자체가 민중불교라든지 그런 또는 대중과 교감하는 그런 것보다 권문세족의 그런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얼굴 인상에서 보면 대단히 권위적이고 고려불화는 전부 마음에 드는데 얼굴에 마음에 안 드는 그런 불화를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굉장히 근엄하고 그리고 상하 구도가 무지하게 엄격하고 아주 그렇게 엄격할 수가 없고, 나중에 조선시대 보이고 있는 대중 불교적인 그 구도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여성상을 따서 그린 ‘수월관음도’에서도 그 얼굴의 상만을 보게 되면 우리가 정감이 덜 든다고 할까요? 그런 이야기를 서슴지 않게 하게 됩니다.

이 소맷자락에 있는데 구름문양을 이렇게 풀어가지고 만들지만 옷깃에 다는 이 보상당초화문이 당초문양으로 연결되고 여기에 당초문양이 연결돼서 은행잎처럼 됐습니다마는 본래는 이게 보상활문이 허리띠를 매니까 반이 이렇게 감춰져 있는 그 모습으로까지 나오게 됩니다.


불화 그릴 땐 밑에 초본 그리고 비단 덮어 다시 베껴



이게 1306년에 만든 그림인데, 지금 이와 같은 명도를 갖고 있습니다. 아까 그 불화하고 거의 같은 구도인데 얼굴만 조금 젊어진 그런 모습이죠. 그러니까 아까 그게 고려불화면 이것도 고려불화라고 그럴 수 밖에 없죠. 더군다나 그런 일이 생긴 것은 불화를 그리는 과정 속에는 반드시 분업을 하는데 이와 같은 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려불화를 만든 사람이 이 그림을 그릴 적에 보면 밑에다가 초본을 놓고 그 위에다 비단을 얹은 다음에 그것을 따라서 실선을 다 그리게 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채색하는 사람이 채색을 하고 그 다음에 문양 넣는 사람이 문양을 넣고 그렇게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아까 일본은행에 소장돼 있는 처음에 봤던 ‘아미타여래 입상’ 보면 옷이 물결을 치고 있는데 문양이 물결이 치는 게 아니라 옷 주름이 물결을 치고 문양은 문양대로 그대로 들어가고 끊어놓은 것 가지고선 만들어 놨죠.

요즘에 리얼리티로 하면 옷자락이 출렁거렸으면 문양도 같이 출렁거려야 되는데 이거는 철저하게 분업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옷 주름을 그린 사람 다음에 문양이 들어가니까 그와 같은 결과가 나왔던 겁니다. 그게 고려불화가 거의 몇 가지 패턴 속에서 계속해서 그림으로 그려진 내력이기도 합니다.

아미타삼존도를 보게 되면 좌상이고 입상 지금 좌상인데 이 관음과 세지 두 분이 모셔져 있었는데, 이 보관을 쓰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발이를 하든 소발을 하든 민머리든 곱슬머리든 그냥 머리로만 남아 있는 것은 그거는 열외고, 그리고 보관을 쓰고 있어야지 보살입니다.

보관을 쓰지 않는 보살은 유일하게 지장보살 한 분 뿐이 없습니다. 그분은 지장보살은 자기는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한 다음에 마지막에 가서 자기가 구제되겠다고 영원한 구도자를 자원을 했기 때문에 스님의 모습으로 해서 등장을 하는 것이고, 그리고 보살은 기본적으로 보관을 써야 합니다. 이 보관을 쓰는데 보관 이 머리 여기에 동그란 마크가 있는데 거기에 부처님 화불이 그려져 있으면 관세음보살이고 정병이 그려져 있으면 세지보살입니다.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죠.

이 관음과 세지가 있는데 고려불화 속에서 그 상하2단 구도는 절대로 이 두 협시보살이 부처님 무르팍 위로 머리가 올라오지를 못합니다. 이 공간을 이렇게 비워둘지언정 이 아래쪽에다가 딱 끊어 놓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되면 이 분들이 슬슬 기어 올라와 갖고 여기까지 이렇게 쓱 올라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보살들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보면은 하얀 투명한 옷을 걸치고 있죠. 사라를. 저걸 어떻게 그렸을 까요? 영어로 얘기하면 시스루 패션(See-through Fashion) 이라고 하는 건데 속살이 보이는 패션인데 그것은 속살이 보이는 옷은 그냥 하얀 옷을 입으면 되는데 뭐 투명한 옷을 입으면 되는데 그림에서는 저걸 어떻게 망사를 그리면 속이 안 보일 거 아니에요? 그런데 고려불화는 그것을 그려냈단 말이에요.

디테일을 보죠. 이와 같이 지금 정병을 그렸죠? 그러니까 세지보살이라는 얘기죠. 여기에 지금 흰 사라를 이렇게 걸쳐서 속살을 거쳐가지고선 밖에 걸어 놓은 거가 속살이 보이게 흰 투명한 사라를 보이는데 하여튼 얼굴은 좀 아까 얘기한 대로 너무 권문세족화 돼 가지고... 멀리서 이렇게 봐라봤을 적에 흰 사라로 걸친 걸로 이렇게 보이고 있는 것이 그게 속으로 디테일로 해서 들여다봤을 적에는 이와 같은 금테의 선과 이 사라의 문양들을 집어넣으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 비결은 이다음에 이따 다른 디테일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와 같이 ‘아미타삼존도’에 입상을 그릴 적에도 그 위를 무슨 크기에서 엄격한 차이를 놓고 그리고 팔꿈치 아래쪽에다가 두 협시보살을 두는데 이때에는 정면으로 하지 않고 3/4 정면으로 해서 그린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여기에서도 흰 사라를 그린 것이고 이와 같이 되고 이 연꽃 문양이 한 8센티 정도로 작아지면서 옷 주름이 이렇게 갈라진 모습을 그려오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 머리 있는데 여기 수염이 있고 중성이니까 수염이 있고, 그리고 여기 보면 八자가 이렇게 써 있죠? 머리끝에. 보이나 온 보이나? 안 보여요? 아까도 있었어요... 여기서도 여기에 머리카락 있는데 옆에 八자가 이렇게 살짝 쓰여 있었죠? 그거하고 똑 같은 위치에 여기에서도 八자가 보이고 계속해서 보살의 경우에는 八자가 이렇게 보일 겁니다. 그게 또 불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한 매력인데, 이게 왜 八자가 있냐면 머리를 이렇게 올려서 모자를 이렇게 뒤집어쓰니까 솜털이 이렇게 八자로 날렸다. 이런 뜻으로 맵시로서 그려놓은 거예요.

그랬는데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게 그리는 사람이 모르게 됐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저것이 고려불화에서 멀어져서 조선시대로 가게 될수록 이 八자가 머리에서 떨어져서 나중에는 이마 가운데 八 이렇게 써 놓은 거가 나오게 됩니다. 이따 보게 될 거예요.

이건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미타삼존도인데 아주 예외적인 것입니다. 본래는 관세음보살하고 세지보살을 모시고 있어야 되는데 워낙에 구복신앙으로 인기가 있는 분이 관세음보살하고 지장보살이니까 세지보살을 빼버리고 그 자리에 지장보살이 와서 탁 앉아 버리고 서 있고, 그 다음에 관세음보살이 여기에서 투사를 탁 해서 여기서 중생을 구제하고 있는 그림으로 그려서 진짜 구복신앙의 에센스만 여기다 딱 모아가지고서 해 놓은 거예요.


고려불화를 당시의 신앙형태로 재해석 하기도



지옥으로 죽어서 명부의 세계에 가면 이 분한테 심판 같아야 되고 극락세계 가려면 이 분한테 잘 보여야 되고, 살아 생전에 뭐 어려움 있을 때는 다 해결사항이 다 전지전능한 만능의 관세음보살 아니에요? 이 세 분만 있으면 안 될 게 하나도 없지 이승이고 저승이고. 그니까 이 세 분을 다 모아 놓았어요. 그러니까 그 딱딱했던 고려불화에 하나를 완전히 당시의 신앙의 형태 속으로 재해석을 한 것인데, 사실 이런 작품이 많았으면 고려불화는 훨씬 더 많은 다양성을 가졌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있는 9점 중에서 이것만은 아마 국보로 지정이 됐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느낌으로 해석을 했는지 이 지정보살도에 저 아미타삼존도에 나오는 지상보살이나 세 분의 삼존이 모두 다가 점점 다른 불화에 비해서 인간적으로 그렇게 그립니다.

이거는 아미타팔대보살도인데, 어쩌면 여길 놔도 여기 옹기종기 여기다 8명을 다 여기다 놔야 돼. 하여튼 이 무르팍 위로 가면 안 되니까... 아미타팔대보살도는 지금도 많이 유행해서 지리산 천음사 뒤에 있는 것이 조선 후기에 만들었습니다마는 아미타팔대보살도로 아주 유명하고, 그 아미타팔대보살도를 고맙게도 천음사에 있는 불화는 18세기 건가요? 근데 거기에 허공장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하고 8분의 이름을 다 써놨어요.

근데 실제로 보살 중에서 8분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화불을 그려있고 정병을 그려있는 그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그 다음에 스님의 모습을 쓰고 있는 지상보살 이외에 나머지 보살들은 어떻게 배치했는가가 확실치 않은데 천음사에 그게 다 써 있어서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봤는데 나중에 봤더니 또 그것도 그분이 잘못 쓴 거였어. 그게 지금 천음사 서류를 가지고서 공부했던 걸 다 지금 또 뒤집어야 되는 그런 입장이 돼 버렸어요.

다음은 수월관음이라고 하는 물방울관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게 지금 일본 천초사에 소장돼 있는 거고, 그것은 오래전부터 고유섭 선생님도 이 작품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구도에서부터 아주 환상적인데 나는 이 작품을 본 일이 없고, 이 작품을 제 또래에서 누가 봤다고 그러면 거짓말입니다. 공개를 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사히신문에서 만든 책에도 실리지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센소지에서 축제를 할 적이면 텔레비전 회사들이 헬리콥터를 타고서 촬영을 할 정도로 엄청난 관광지이고 대사찰로 모여드는데, 그 절에서 하여튼 공개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 가지고 한 번도 바깥바람도 쐰 일 없고 그 다음에 옛날에 찍었던 사진들이 그냥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질 따름 인 건데, 이 작품은 이쪽 끝에 고려승 해효가 그렸다라고 하는 그 사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고려불화를 보고 이 작품이 그동안 고려불화가 원나라 때부터 그렇게 유명했던 거가 헛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데 유일한 증거로써 이야기 되다가 처음에는 한 50점 그게 어디냐 했는데 지금은 150점까지 헤아릴 수 있고. 베를린 뮤지움이 한국 미술품이 한 30점뿐이 소장된 게 없는데 거기에 유명한 지장보살 고려불화 지장보살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파리에 기메 뮤지움에 고려불화가 두 점이 소장돼 있습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갔더니 한국 미술품은 하나도 없다고 그러는 사람이 있는데 그 말 맞죠. 근데 정확하게 얘기해서 파리에 있는 박물관은 박물관이 서로 기능을 나눴어요. 그래서 서양미술사에서 17세기까지 오는 것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고, 그니까 동양미술품이 하나도 있을 수도 없고 피카소나 이런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거죠. 피카소는 둘째 치고 모네도 거기에 없죠. 그리고 근대 미술은 오르세 뮤지움에 있고, 그 다음에 현대 미술은 뽕삐두 미술관에 있고, 그리고 동양 미술품은 기메 뮤지움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메 뮤지움이 파리 우리가 얘기하는 돈황 문서라고 하는 것도 팰리오 문서도 기메 뮤지움에서 갖고 있고, 그리고 한국 미술품도 국제 교류재단에서 지원을 해 가지고 한국실을 갖고 있습니다. 전전에는 일본에 있는 화가 이완씨가 개인소장 하고 있던 민화도를 기증을 해 가지고 그걸 오래 전시 했었고, 그리고 우리 문화재 연구소에서 기메 뮤지움 도록을 우리가 잘 만들어 가지고 지금 팔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여튼 잘 만든 게 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움엔 몇 점인지 내 정확히 모르겠는데 한 3점정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세계에 있는 유수한 미술관에서는 고려불화라고 하는 것이 하나가 있어야지 기운을 잡는 군수가 잡히는 겁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한 점도 없습니다. 이게 돈 있다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팔아야죠. 갖고 있는 사람은 하나를 더 가지려고 그러는 판이고, 일본 전통 사찰에서 나오는 거는 안파는 거고, 그리고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거가 어쩌다 팔아야 되는 건데 그때는 엄청난 값을 요구를 하는데. 지금 초창기 80년 무렵에 호암미술관이 고려불화 살적에도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에겐 팔려고 하지 않아서 그 작품을 사서 미국으로 보내서 거기에서 수입해 갖고 왔습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사갖고 왔더니 관세청에서는 세금 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 문화재 행정 속에서 지금은 이제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한 때에 외국에 나간 반환문화재 대책이 뭐냐고 그냥 얘기하고 있는데 난 그럼 그래요. ‘대책 없다’ 그러죠. 사올 돈도 없고 팔지도 않고 또 다 사올 이유도 없고. 거기에 있는 거는 그것이 우리 문화를 대변하고 있는 것인데 그걸 다 사갖고 들어오면 어떡할 거냐? 그니까 정밀하게 이야기를 해야 되는 것인데 마치 그거를 사갖고 오는 거가 애국적 관점인 것처럼 생각만 하고 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또 그럼 그런 애국적 행위한 것에 대해서 누가 보상을 해 주기는 커녕 이 자금 출처가 어떻게 되고 세금 내라고 하는데 그거는 또 어떻게 얘기할 거겠어요? 우리가 자기 모순 되는 행동과 언행을 참 인 삼아서 많이 하고 있는데 그게 우리가 많은 과정 속에서 이성이 파괴 돼있는 사고와 생활을 많이 했고 또 한편은 식민지 시대를 겪었던 그 피해의식이 잔재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분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은 뭐 지금 언제고 한번 공개한다면 달라 빚을 내서라도 가서 보고 와야 되는데, 저것이 저 불화가 고려불화의 명성을 높여줬고 그로 인해 가지고 지금 세계 유수한 박물관에서는 전부 고려불화들을 하나씩 몇 점씩 갖고 있는 거가 됐습니다.


관세음보살에게 무릎 꿇고 묻고 있는 모습이 인기



수월관음도에서 고려불화 중에 최고의 인기 품목은 이 앉아 있는 보타락가산에 앉아서 용맹 정진하고 있는 반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하고 있는 수월관음 그리고 선제동자가 남쪽으로 쭉 돌아서 55 선지식들에게 물음을 구하다가 마지막에 여기에서 관세음보살에게 물음을 구하고 있는 무릎을 꿇고 물음을 구하고 있는 그러한 모습입니다. 옆에는 수정 같은 산에 대나무가 청죽이 두 개가 올라가는 걸로 돼 있고 머리에는 두광이 있고 몸에는 거신광이 둘러 있고 저쪽 바위에는 정병이 있고, 정병에는 버드나무가 꽂혀 있고 밑에는 승반이 있는 것이 이게 정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게 수월 고려시대에 그려진 수월관음도의 정형은 이 그림입니다.

내가 그래서 이거를 보고 수월관음 관세음보살이... 관세음보살이 수월관음 물방울관음에서 오른손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쥐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쥐고 있는 이유를 항상 저것이 난 궁금했어요. 왜 저렇게 했는가? 이 그림을 보고서 알았어요. 이분이 이렇게 앉았다가 일어날 적엔 이거 들고 일어나는 거예요. 자기 휘장의 싸인 이었던 거죠. 그랬더니 또 사람이 생각이 명석한 건지 아니면 오버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 버드나무에 아스피린이 있기 때문에 이 약효가 좋아서 그걸 갖고 다닌다 뭐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스피린이 버드나무에서 뭐 추출을 한다고 그래요.

이 수월관음도는 서구방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렸다라고 하는 지치3년 개해 6월에 월6월 일에 내반종사 서구방이 그림을 그렸고, 동양도인 육정이 뭐라고 해서 돼 있습니다. 동양도인은 이것을 갖다 걸어놓은 것은 육정 스님이었다라고 하는 걸로 돼 있어서 고려불화에 화가 중에 해효 스님 다음에 서구방이라고 하는 화가를 우리가 알게 됐습니다.

여기에 국화꽃 같은 문양을 이렇게 해서 보관머리를 탁 씌워서 이 그림만 하더라도 지금 머리털 솜털이 살살 이렇게 여러 가지로 이렇게 돼 있잖아요. 이게 나중에 八자 딱 썼다는 게 유래가 거기서 나오는 것이고, 사라를 이렇게 돌리는데 이렇게 사라를 돌렸는데도 비단 모습이 나오는 거는 그 때 야마도 군가깡 전시회 갔을 적에 유리장 안에 들어갖고. 제가 그 유시다 히로지라는 분하고 잘 알아가지고 이 유리장 안에 들어가서 이 5배짜리 돋보기로 보고서 알았는데 뭐 그렇게 노력 안 해도 이 슬라이드로 10배 확대한 거로 보면 아는 것인데 그랬습니다.

발바닥 있는데 닿는 보상화가 돌려있고 그 다음에 연꽃 문양은 연꽃잎과 꽃으로 만들었고 여기에는 구관문에다가 국화 문양을 집어넣었고. 엄청나게 화려한데 바로 여기 이게 흰 사라가 돌아가는 그 부분입니다. 이거를 보니까 이게 흰색을 칠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밑그림으로 이것을 여기 그리듯이 여기를 다 그리고 난 다음에 여기에다가 흰 칠을 하는데 칠한 게 아니고, 왜 하늘에서 내린 눈 돋보기로 보면 육각형 터지는 거 있죠? 바로 그런 방사선을 여기다가 수십만 번을 그은 거예요. 커다란 선들을. 그러니까 그것이 칠하지 않고 시스루 패션으로 보였던 거죠.

흰 사라의 결은 위로 해 놓고 속옷 안에다가 여기에 지금 흰 망사를 갖다가 하여튼 수십만 번을 그거가지고서 겹쳐져 있는 모습을 해 놓고 디테일을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거가 고려불화가 정말로 아름답다는 찬사를 보이게 되는 내력입니다. 모든 명작에 공통점은 디테일이 아름답다고 제가 얘기했죠. 석굴암도 그렇고 소설에서도 고요한 농관 같은 것은 디테일이 묘사가 뭐 스텝위에 핀 꽃 같은 거 묘사한 거 보면 정말 눈물나게 해 주죠. 겸재나 단원 같은 그림 같은 거 보면 디테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먹을 쓴 거라든지 인물묘사에 오묘함이 다 나온단 말이에요.

김홍도가 그린 그 씨름판 그림을 보면 이만한 종이에다 그렸는데도 그 속에서 누가 청 샅바 편이고 누가 홍 샅바 편인지 표정을 보면 다 나오게 돼 있잖아요. 그죠? 사람 크기 그린 것이 손톱 만하게 그렸는데도. 지금 고려불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디테일도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이게 유리승반을 모셨는데 청자를 모셨는지 이건 유리승반이라고 봐야 겠죠. 그것도 또 정병이 투시 돼 있는 거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와 같이 투시도법을, 투시도법이 아니라 투사법을 사용을 했습니다.

그 중에 대덕사 다이도꾸지에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거기에 쭉 있다가 유명한 잇규스님이 살해당하게 되는 전설을 갖고 있는 그러니까 센노리뀨라고 하는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다도 차 선생님이었던 스님이 거기에 있었는데 그 분이 떠나고 난 다음에 목조각상을 우리로 치면 만세루 위에다가 모셔놨어요. 그랬는데 이 대덕사에는 풍신 수길이 1년에 한 번씩은 갔거든요. 그때 누가 고자질을 했죠. 센노리뀨가 오만해가지고 당신이 그 밑을 지나가게 했다고, 그거가 센노리뀨에게 자살을 명령했던 원인 5가지 중에 하나로 꼽는 유명한 대덕사 다이도꾸지에 있는 이 수월관음도도 아주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까 아미타 삼존불이 변화를 줬다고 그랬는데 이 그림에서는 보타락가산에 있는 관세음보살은 놔두고 이 밑에 있는 것을 있는그대로 갔다가 넣어서 동해용왕이 지금 관세음보살에게 바치고 있는, 그 밑에 시녀들이 동해용왕을 바치고 있는 그 모습을 그대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더욱이 거기에는 아름다운 선제동자가 있고 그 위쪽에는 극락조가 입에다가 모란꽃을 물고서 이쪽 바위 쪽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하는 그림을 그려서 회화로서의 멋과 불화로서의 갖고 있는 성스러움이 동시에 충족돼 있는 최고의 명작으로 지금 꼽히는 것이 대덕사에 있는 수월관음도입니다.


대덕사 수월관음도는 성스러움 갖춘 최고 명작으로 평가



이게 가라쯔 당진이라고 하는 곳에 가라쯔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규슈에 있는 가가미 진자라고 하는 경신사에 있는 탱화인데, 이건 좌우가 바뀌었어요. 그리고 크기가 높이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4. 8m 인가 그래요. 굉장히 창대합니다. 저 작품이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대고려 국보전 때 와 가지고 지금은 없어진 호암미술관 아래위로 터진 그 공간에 걸려 있었죠. 정말 장관입니다. 거기에 선제동자가 지금 이쪽은 헤졌는데 헤진 속에 아주 진짜 다정불심을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 있는 그런 그림을 그려줍니다. 이 그림은 어딘지 좀 다르죠? 이게 원나라 때 불화입니다. 그래서 여러 포즈에서부터 또 선제동자 머리에 두광이 있는 거에서부터 여러 가지가 다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지장보살도는 지장보살은 그러니까 여러분이나 나나 절에 가가지고 괜히 대웅전 뭐 극락전 이런 데 가서 절할 필요가 없이 가면 즉시 명부전에 가서 지장보살한테 빽을 써 놔야 되네. 죽으면 이분한테로 가는 거지 거기로 안 가요. 그러니까 이 분이 시왕을 거느리면서 염라대항을 비롯한 시왕을 거느리면서 명부의 세계에 가서 재판을 받아야 되는 건데 저 분은 피모지장과 승용지장으로 둘로 나오는 것이 아까 얘기한 대로 영원히 자기는 마지막 중생까지 구제하겠다고 하는 그런 뜻을 가졌기 때문에 스님의 머리로 해서 이렇게 나타나고, 손에는 육환장과 고리가 6개 돌아가는 지팡이 손잡이에 여기에 육환장과 여의주를 가지고 지물로 갖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서서 입상과 좌상이 있는데, 또 그래요. 이 분이 권속이 굉장히 집안 식구가 굉장히 많아요. 이 지장보살도에 그려져 있는 옷문양이 이 옷문양 속에서 나오는 거가 지금도 만봉스님이나 이런 분들이 단청장들 보면 문양 패턴 집을 갖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때 그때에 거기다가 옷에다가 문양을 집어넣는 거를 따로 다르게 하게 됩니다.

불화에 본을 뜨는 방식이 밑그림을 그려놓고 그 위에 다가 비단을 놓고 이렇게 하기도 하지만은 또 한편으로는 본을 놓고 본을 위에다 씌워 가지고선 이렇게 바늘로 구멍을 뚫어가지고서는 분칠을 해 가지고 그 다음에 그걸 따라서 그림을 그리게도 하고 하는 방법을 쓰는데, 고려불화의 경우에는 그런 일이 없고 조선시대 불화의 경우에는 이 밑에다 놓고 위에다 그리고 밑을 떼지 않아서 표구할 적에 그 초본이 같이 떨어져 나오는 경우가 아까 보여드린 초본이 그렇게 해서 나온 거였습니다.

밑에 옷에다가 집어넣은 국화꽃 문양으로 해 가지고 만들어 놓은 이 문양들을 보면 상당히 고려적인 것으로 세련됐다고 하는 문양으로 우리가 청자나 고려시대 때 나전칠기 같은 데에서 봐왔던 그런 문양인 것을 정서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처음에 일본은행 첫 번째  보여준 거가 어딘지 비고려적이고 그냥 중국적이란 말을 쓰기 싫어서 그냥 불교적인 그런 느낌을 줬다고 얘기한 건 그런 근거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자를 쓰고 있는 피모지장의 경우에도 여의주하고 육환장을 그대로 갖고 지니고 있고, 여의주하고 육환장은 지니고 있는데 일본 정가당에 갖고 있는 소장하고 있는 이 지상보살도 밑에는 권속을 전부 무르팍 아래다가 모셔놨는데 명부에 메신저 한 사람, 판관 두 사람, 재석천, 범천, 사천왕 네 사람, 시왕 지장 시왕 그리고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전부 더해 보십시오. 몇 명인지 하여튼 그 사람들을 전부다 여기다 놨는데 여기에 또 사자까지 집어넣어서 그리는 경우가 있으니까... 이렇게 바글거리게 모셔놓는데 이분들은 명부의 판관이고 그 다음에 시왕이 10명 있고 재석천 범천 무독귀왕 도명존자가 있는데 죽으면 가는 순서를... 지금 이 분이 메신저입니다.

명부에. 그래서 지금 여기에 두루마리를 가지고서 대한민국 대전광역시 유성구 둔산동 몇 번지 누가 죽었습니다. 그래갖고 그 살아서 생전에 했던 일을 쫙 갖고 와서 판관한테 주면은 7x7=49일 동안에 시왕들에게 돌아다니면서 전부 재판을 받으면 거기에서 지하3층 뭐 지상2층 이렇게 판결이 나면은 그 층수대로 가서 영원이 살게 되는데, 거기에 여기 사천왕하고 도명존자하고 무독귀왕하고 제석천 범천까지 해서 지장이 권속으로 있는데 지금도 명부전에 가면은 지장보살 양 옆으로 서 있는 순서가 저 순서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명부전을 보면 스님이 보살보다도 더 제석천 범천을 보고 스님이 보살보다도 더 높은 데 앉아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이 나오는 거가 바로 그 지장의 그 계보 속에서 있던 걸 몰라서 그렇게 얘기 하는 거죠. 그 중에는 아예 다 빼버리고 너무 많으니까 지장보살 옆에 도명존자하고 무독귀왕하고 두 사람에다가 명부에서 있는 진짜 사자죠. 사자하고 이렇게 셋 만 딱 그려놓고 그림이 따로 존재하게 됐습니다.

이 고려불화가 내가 보면 수명이 한 70년 있었는데, 이거가 좀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있었으면 훨씬 더 같은 버라이어티를 갖고 있었을 턴데 지금 현재 보여지는 거는 길게 잡아서 70년, 짧게 50년 동안에 한 목적에 의해가지고 만들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한 시대에 반짝 하는 걸로 되고, 마침 그때가 원나라가 물러나고 나면서 권문세족들이 또 세력을 잃게 되고, 그 다음에 홍건족이 등장하면서 사대부 계층이 들어오는 교체기였기 때문에 이 고려불화가 갖고 있었던 불화의 전통은 거기에서 끝나고 그 뒤에는 여진으로만 남게 됩니다.


원나라 몰락 따라 권문세력 교체로 고려불화 쇠퇴



그게 지장보살도가 조선시대 와서 그리는 게 이 수준으로 그리게 됩니다. 대신에 이 사람들이 다 기어올라서 빙 들러 싸죠. 밑에서만 바글거리던 사람들이. 그리고 채색을 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거가 도저히 고려불화하고 조선불화를 비교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제가 조선불화를 낮게 평가해서가 아니고, 테크닉이라든지 공력이라든지 거기에 쓰여져 있는 모든 예술적인 노력을 비했을 적에 아마 시간까지 포함해가지고서 그 둘은 같은 불화라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별개의 예술 세계를 갖고 있었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게 전부 나중에는 어지러워 가지고서 질서를 찾을 수 없는데 사실 이것이 민중불교의 입장에서는 이게 더 맞는 겁니다. 그렇죠? 마치 운주사가 주는 감동 같은 거죠.

관무량수경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 서품이 있는데, 관무량수경 그 무량수경 그 아미타경이 정토삼부경인데 4페이지에 한 번 보십시오. 관무량수경이라고 하는 것은 무량수경 앞에는 서품이 먼저 있습니다. 프롤로그가 있어요. 왜 이 경전을 말하게 됐는가 그게 관무량수경의 서정에 해당하는 얘기를 그림으로 전개한 것인데, 부처님 당시에 마가다국의 왕 빈비사라와 왕비 위데휘 사이에 왕자가 없었는데 늦으막에 태자 아사세를 낳게 되자 한 점쟁이가 ‘이 태자는 아들을 얻기 위해서 살해한 선인이 원한을 품고 탄생했기 때문에 반드시 이아들이 당신을 죽일 테니 죽이려 덤빌 테니 후한이 덤비는 후한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찍 죽여야 한다’라고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 예언에 따라서 몇 번이나 이아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태자가 죽지 않아서 시녀가 길렀는데, 후에 이 태자가 왕이 된 다음에 태자가 이 사실을 알고 부모인 왕과 왕비를 유폐시켜 버리는 일이 생기게 됐습니다. 그니까 그 예언자 점술가 얘기가 맞았던 거죠. 그렇게 되자 왕비는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고 있는 부처님께 구원을 하게 됐는데 그때 부처님께서 알려줬던 극락세계에 도달하는 16가지의 방법을 얘기해 준 것이 관무량수경입니다.

이렇게 하면은 아미타의 세계 극락세계를 볼 수 있는가 16가지 방법에 대해서 설명을 했던 겁니다. 왜 이 내용을 그렇게 좋아했는가 하는 것은 역시 이 불화가 그려진 거가 충렬왕과 충선왕 때에 그려진 작품들이기 때문에 그 왕과 왕자 사이에 있었던 갈등의 관계라고 하는 거가 이 서품하고 관경서품하고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 문명대 교수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보면 처음에 금모의 장 금단의 집 해 가지고 여기를 위데휘 왕비하고 그 다음에 빈비사라 왕하고 위데휘 왕비가 유폐되어 있어서 그 충신 두 사람이 먹을 것을 갖고 들어가려고 그러는데 아사세를 태자가 칼을 들고서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10대 제자 중에서 설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부루나 존자입니다.

그래서 어디 가가지고 유세에서 강의했다 하면 무조건 부루나 존자가 해서 부루나 존자가 임금에게 이 설법을 하고 있고 위데휘 왕비는 천상의 세계 영축산의 부처님에게 향을 피우면서 빌고 뒤에 5백 시녀가 뒷바라지 하고 있었다하는 얘기를 지그제그 형상으로 해서 그림을 전개합니다. 여기에 보면 이게 기둥들이 아까 있는 데에다가는 또 역시 특유의 솜씨로 서품변상에 나오는 얘기를 여기 주련처럼 다 써 놓은 거예요. 세종께서 또한 부루나 존자를 침리왕에게 보내셨다하는 거가 아까는 여러분들이 뵈는 둥 마는 둥 했지만은, 여기에 지금 침리왕이 여기 앉아 있고 이 기둥에 노란색이 보이고 있잖아요? 이 노란색이 보이는 거가 지금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숨은 글씨 찾기 식으로 이렇게 딱 써 놓은 겁니다.

이 한 폭의 그림이 지금은 찾아볼 수 있는 고려불화를 얘기하는데 유추하는데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됩니다. 중요한 이유는 이 부루나 존자 뒤에 대나무 병풍 가리개가 지금 있습니다. 이건 분명히 고려시대 풍인 거죠. 그림 속에 그림이지. 그리고 이 바닥에 타일같이 그려놓은 거라든지 이파리 그린 거 바위 칠하는 거 이것들이 이 이후 안견의 그림에 몽유도원도에 나오는 그 과정하고 연결을 하는 거가 지금도 미술사에는 아주 큰 연구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은 이 똑같은 관경변상을 밑에서부터 그냥 위로 올라가면서 부루나 존자 위데휘 왕비 그 다음에 부처님으로 연결돼서 천상의 주악이 울려 퍼지는 걸로 만들어 놓은 작품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충신 둘이 들어가려고 하니까 아사세 태자가 칼을 뽑고서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모습인데, 여기에서도 나무 두 그루가 그려져 있는 거라든지 하는 거가 지금 고려시대 회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의 자료로 나오고 지금 여기 설법을 지금 받고 있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렇게 해서 극락세계를 볼 수 있는 거가 일상관에서부터 해가 뜨면은 해를 보는 데서부터 시작해 가지고선 일상관 수상관 해가지고 여기에 전부 이쪽에 12개 그 다음에 여기 일상관 하면은 13개 나중에 상품관 중품관 하품관해서 상품 상생에서 하품 하생까지 9개의 9품만다라를 통해가지고 이 극락세계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린 게 이 관무량수경변상도입니다. 그래서 가장 고려불화 중에서 가장 내용이 많고 화려한 것은 관무량수경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누가 극락으로 가게 되면 연꽃으로 화해야 됩니다.

그래서 연꽃으로 환생을 해 가지고 피어나오면 연못으로 연지각으로 들어오게 되면은 여기에서 접수를 받아가지고 그 다음에 이 위로 올라가면 먼저 와가지고 극락세계에 온 사람들이 아주 화려한 것을 바라보면서 또 한편으로는 저기 또 누가 올라온다고 구경하고 있고, 주악이 울리고 있는 그런 세계로 전개가 되게 됩니다.

이 작품도 대고려 국보전 때 출품이 됐었습니다. 처음에는 제1표 일몰지간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극락세계를 보는 것에 대해가지고서는 쭉 설명을 해서 이 지는 해 속에서 그 극락세계에 2층 중층누각으로 해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그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연꽃으로 피어나기 직전에 모습이고 거기에는 온갖 보배로운 것들이 장식돼 있는데 학이 날고 있고 지금 여기 한 사람 피어났죠? 여기 연꽃이 열어지면서 한 사람이 싹 해서 지금 이제 이쪽에 계단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극락세계 모습 한 폭으로 그린 것이 관무량수경변상도



그러면은 여기에 지금 엎드려 가지고 부처님의 내용도라고 하는 거 있죠? 웰 컴 투 파라다이스 지금 그렇게 얘기해서 지금 여기로 올라가면 그 위 전각 속에서는 지금 도달해 있는 사람들이 전부 환상적인 세계에 취해 있고 위에서는 제 불상과 보살들이 지금 극락으로 환생하는 거를 축하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야! 극락이 이러네’하고서는 환한 데 죄다 머리 깎은 사람들만 극락가고 이거 뭐 머리 있는 사람 몇 사람 안 됩니다.

아까 웰 컴 투 파라다이스하는 바로 위거든요? 초생접인 수기지처 해 가지고 처음에 연꽃에서 태어나가지고서 수기를 받고 있는 곳이 그 아래쪽이다 해서 이 관무량수경에 있는 내용들을 전부 주련으로 해 가지고 또 이와 같이 그림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볼 수 있는 것들은 장식문양을 하면서 보살을 통해서 극락세계를 보는 과정들을 상징적으로 해서 제11 세지 관음 시자 해 가지고서 그 내용들은 궁금하신 분은 관무량수경을 사서 보시면 나옵니다.

이거는 관무량수경의 내용 중에서 상품 중품관 하품관 세 개 만을 모아 가지고서 만들었어요. 나머지들은 다 빼버리고 중앙을 중심을 두고 중앙에 중심을 놓아 놓고, 16관중에서 일부만 일몰지관 같은 거만 넣어 놓고 상품 중품 하품을 놓으면서 그림의 구도를 넣어가고 그랬는데 내용인 즉슨 밑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거에서부터는 같습니다.

이 학과 연꽃 고려시대 때에 화조화를 연상시켜주는 그림에서 지금 여기에 하나씩 연꽃으로 여긴 굉장히 많이 피어나요. 이렇게 피어났는데 피어나는 사람 옆에다가 중품 중생 여기는 하품 하생 이렇게 죄다 상을 하나씩 다 달아가지고서는 극락으로 들어가는 거가 하품 하생에서 상품 상생까지 불교에 대한 공격과 지식과 그거에 따라가지고 분리되는데 여러분들은 대개 하품 중생 왜냐하면 미술사 강의 들었으니까 하품 중생 정도 되고, 일단 상품이 되려면 머리를 깎아야 됩니다.

그리고 아까 그 스님들 먼저 올라온 주악이 여기 춤추고 있는 그 전각은 마찬가지로 여기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미륵 하생경 변상도라고 하는 것이 미륵 상생경과 하생경이 있는데 하생경이 이제 내려와가지고 용하수 아래에서 내려와서 중생을 구도하는 건데, 여기에 책에 써 있을 거예요. 미륵 하생경은 도솔천의 미륵이 우두말대성에 하생해가지고 용하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당시 구제되지 못한 모든 중생을 구제해 주는데 왕과 왕비까지 와 가지고서는 머리를 깎았다라고 하는 그 이야기들이, 씨를 한번 뿌리면 7번 추수를 하고 있다고 하는 그런 내용들로 구성 돼 있습니다.

그래서 미륵이 이제 하생을 했기 때문에 보살이 아니라 부처의 열외의 모습으로 나오게 되고, 그리고 보살을 시동하고 여기 왕과 왕비가 지금 머리를 깎는 장면이고 이 밑에서는 보주를 바치고 있는 장면이고, 여기 7번 추수하려고 씨를 뿌리고 있고, 거기 한 장자가 토굴 속에서 아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런 내용으로 돼 있습니다. 천상에는 역시 주악이 울려 퍼지고 있고요. 이 그림의 핵심이 여긴데 여기에다가 16난을 나한도를 뒤에다 그렸는데 이 미륵을 보면 말이에요. 오른발하고 왼발을 바꿔 그려놨어요. 그렇죠? 이 발이 여기로 가고 이를 발이 여기로 와야지. 이렇게 생긴 발이 어디 있습니까? 저 굉장히 궁금한 거예요.

이 불화에요. 그림이 아니기 때문에 불화에 도상이 틀렸으면 다시 그리게 돼 있는 겁니다. 근데 이거하고 똑 같은 그림이 있는데 거의 같은 본으로 있는데 거기도 이렇게 그렸어요.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있는 이유 중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거는 우리나라에도 몇 예가 있는데 미륵은 반가사유를 이렇게 한 것이 제일 많이 앉아 있는 거가 알려져 있죠?

그런 중에 교각상이라고 해서 다리를 꼬고 잘 앉아 있었습니다. X로... 그랬는데 이렇게 앉아가지고 이러다가 담요 같은 거를 덮고 앉았으니까 그림에서 할 적에 발만 발목가지만 떼어 가지고 따로 그려 놓으면 저렇게 발이 비뚤어져 그린 것이 아닌가. 아까 솜털 날리는 게 八자 딱 쓴 거나 발을 바꿔놓지 않고 다리를 꼬았던 거를 폈는데 그냥 발은 그대로 놔두거나 똑 같은 현상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게 틀린 거는 절대 아니고 도상 이해를 잘못해갖고. 어떤 영감님이 그렸는지 이게 무르팍이 여기 분명히 그려져 있는데 어떻게 발을 그렇게 그리나는 말이야.

지금 머리 깎고 있는 장면이 굉장히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서 머리를 깎겠다고 덤빕니다. 이거는 고려불화하고 관계 고려불화의 내용은 탱화는 거기에서 대충 끝나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작은 칠병으로 이 책 반만 한 사이즈의 나전으로 만들어 져 있는 칠병인데 여기 아미타 팔대 보살도가 있고, 그 뒷면을 보게 되면은 이 담무갈 보살이 금강산에 출현을 해서 담무갈 보살이 금강산에 출가를 해가지고 이태조가 금강산에 갔다가 담무갈 보살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거기에 엎드려서 절을 했다고 해서 이게 태조라고, 고려태조가 절했다고 하는 배첩 절고개라고 하는 배첩이라고 하는 전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또 그 와중에 이 그림이 강화도 선원사 반두 노영이라는 사람이 그렸다고 그러는데 여기가 자기 노영이 자기 이름을 갖다가 딱 써 놨어요. 이 도상에 대해선 아직까지 설명이 그 내력은 우리 전설 속에 나오는 것을 그대로 했는데 다 풀지 못했지만 금강산이라고 하는 것이 전설 속에 나오고 있는 담무갈 보살의 법귀보살이라고 하는 거, 그래서 법귀봉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거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조선 성종 때 그려진 벽화가 고려불화 전통에 가까와



고려탱화가 아니고 고려불화 중에는 오백나한도가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 원나라하고 싸울 적에 항쟁을 할 적에 팔만대장경을 만들듯이 오백나한도도 정말로 그립니다. 그래가지고 지금 현재 오백나한도가 9점이 전해지고 있는데 5백점 그렸을 거예요. 제 몇 번째에요? 뭐 보이거나 말거나 뭐 334번째 스님 뭐 상음수 존자의 초상화 똑 같은 사이즈입니다.

거기에는 전부다 똑 같이 천편일률적으로 국토 태평 성수 천장 영수 만세 지원해서 홍무화 대장 이생이하고 을미년 7월에 동양대장 김의인이 그렸다. 했다라고 하는 이 화기가 다 똑 같은 거가 지금 현재 9개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게 을미하고 을미년 다음이 병신년이죠. 을미 병신 두 가지로만 나오는데 2년 동안에 이 오백나한도를 그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구도가 아까 본 그 화기를 써 놓은 거하고 여기에 존자 이름을 써 놓은 거가 있는데 이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5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고려불화의 전통이 조선시대로 나오면서 무의사 극락보존에 보면은 조선 성종 때 그려진 벽화가 그래도 조선 후기에 그려진 거보다는 고려불화에 가까운 그런 전통을 보여주고 있고, 그 뒤에 있는 수월관음도는 아까 시스루 패션으로 하던 것을 표현할 줄 모르니까 그냥 흰 옷으로 광목천으로 그냥 확 발라버린 그런 그림으로 남게 됩니다.

아주 불가사의한 그림 중에 하나가 조선시대 때 33 응신도, 32 변신도라고 하는 관세음보살 본품에 나오고 있는 관세음보살이 32가지로 변해서 33가지로 변해가지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각 장면마다 도적을 만나면 도적을 물리쳐주고 감옥에 들어가면 옥사장이 되고 뱀을 만나면 뭐하고 하는 32가지로 몸을 변신해 온 거를 각 장면을 32개를 그리고 여기에 그 내용들을 써 가지고 보타락가산에 있는 관세음보살상과 천상을 그려놓는 이 불화와 산수화가 크게 하나로 만들어지는 엄청난 대작이 지금 진원에 있는데, 이 작품은 영암 도갑사에서 있었던 것이라고 여기에 딱 쓰여져 있습니다. 월출산 도갑사에 있었던 것을 왜구가 가져간 것이 틀림이 없는 거죠.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이자실이라고 하는 ‘스스로 자’자에다가 ‘열매 실’자인데, 그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서 아직까지 규명은 없지만은 이동주 선생은 그 이자실이라는 사람이 유명한 송화보월도의 화가 이상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논문까지 쓰시고 가셨어요. 거기에 각 장면들이 바위에다가 32가지로 변신을 해 가고 있는 모습과 각 상황이 이루어나고 있는 장면들을 그림으로 그렸던 조선시대 때 회화의 아주 걸작 중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그러다가 조사당의 전통으로 내려오게 되고 그리고 이건 다 조선 임진왜란 이후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앞에 고려불화하고 다르고 초파일이 되면 야외에다가 법당 지금 내수사와 같은데 이와 같이 괴불을 걸어 놉니다. 초파일이 되면 법당아래에서는 다 사람을 커버할 수 없기 때문에 바깥에다가 담을 쌓아 놓고 그 법의 자리를 펴 놓는 것이 이른바 야단법석이라고 하는 것이 그걸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야단법석을 할 적에 얼마나 시끄럽겠어요. 그게 야단법석을 쳤다고 하는 얘기에 유례가 돼 버렸습니다... 지금 믿을까 말까 그러고 여러분들 생각하는 거 같은데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나오는 그 얘기입니다. 벽초가 한 얘기는 그냥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이거는 대형 불화이기 때문에 고려불화에서 봐 왔던 그런 섬세함을 볼 수가 없습니다. 높이가 10m까지 되는 그런 그림 속에서 아까 봤던 1m 20짜리 그림 속에 있는 내용을 기대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런 중에 조선시대 불화 중에서 울암분경변상으로 나오는 감로탱 이거는 우리 조선불화 속에만 나오는데 여기에 나와서 지옥 속에서 갖가지로 처벌을 받고 있는 이러한 장면들을 그린 것이 사실상의 불화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풍속화의 세계입니다. 정말로 재미있고 뛰어난 그림들이 많습니다. 이 감로탱의 세계를 얘기하는 거는 그거는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제가 20년 전에 책을 만들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고려탱화가 한 점도 없는 상태였다가 바로 호암미술관이 두 점 산 것이 큰 자랑이었는데, 지금은 9점을 헤아리게 되고 앞으로는 아마 살 수 있는 매물로서 나오는 것은 거의 끝난 상태, 그러니까 박물관 아니면 절에서 갖고 있고 해외 곳곳에 박물관에 있으니까 거기에 있는 자리에서 과거 지난 시설 14세기 전반기 고려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었던 위대한 문화 능력이 그렇게 우리 한국 미술사의 한 장으로서 세계 미술사에 나아가서 당당하게 1등을 할 수 있는 품목을 가졌다는 거 그것이 우리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온데: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문화유산을 보는 눈'

 

*등록일 : 2005.4.2. 국정브리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