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배 속이 역사를 바꿨다
<조선일보 2005/7/6/수/문화A25면>
불상 내부 나무판에 선명한 붓글씨
표기된 '중화삼년' 서기
883년
당·일 헤이안 때도 복장유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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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불로 밝혀진 해인사 비로자나불〈조선일보 5일자 A2면 참조〉 1100년만의 ‘보물찾기’는 불상의 배 속에 담겨있는 비밀의 열쇠를 찾은 덕이었다.
지난 6월 초, 법보전 비로자나불상에 새로 금칠을 하기 위해 불상을 내렸던 해인사 스님들은 깜짝 놀랄 발견을 했다. 불상 아래쪽 마개를 열고 속을 들여다보니 ‘中和三年’(서기 883년)이란 글자를 포함, 바로 어제 적은 것처럼 선명한 붓글씨가 남아있었다.
4일 오후 해인사 법보전. 진홍섭 전 문화재위원장, 강우방 이화여대교수, 김리나 홍익대교수 등 내로라하는 불상
전문가들이 모였다. 전문가들은 연방 고개를 갸웃댔다. “붓글씨는 나무판에 적은 것을 붙인 것입니다. 불상에 고정시키기 위해 철못을 네 개
박았고요.” “1100여년 전에 적은 것 치고는 너무 글씨가 선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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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그럴 이유가 있나요? 복장유물을 넣은 곳을 나무마개로 막은 뒤 옻칠을 하고 도금해서 잘 밀봉하면 내부
유물이나 글씨는 잘 남을 수 있어요.”(강우방) 나무판은 자귀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을 정도로 생생했고 못은 거멓게 퇴색해있었다.
한국서 가장 오래된 목불로 밝혀진 해인사 비로자나 부처상의 재발견은 복장(伏藏·불경이나 사리 등을 불상 안쪽에
넣어 두는 것·그림 참조)덕에 가능했다. 명문이 아니었으면 이 부처상은 당초 알려진 것처럼 조선 초기 것으로 남았을 것이다. 복장 명문 덕에
최소한 500여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가 우리나라 최고(最古)이자, 통일신라시대 유일의 목조 불상이 됐다. 전문가들의 안목만으로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실감케한 사건이다.
복장이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리스의 영향으로 간다라지방에서 불상이 처음 만들어진 서기
1~2세기 때에는 복장 유물이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부처의 심장을 상징하는 복장유물을 불상 안에 넣어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생각이
곧 자리하게 됐다. 당말(서기 10세기)에 이르러 불상 내부에 인간의 오장육부 형상을 넣는 것도 유행하게 됐다. 일본 헤이안시대(서기 8세기
말~12세기 말)불상에서도 그같은 복장이 발견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번 해인사 목조 불상이 발견되기 전까지 통일신라시대의 목조불상이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오장육부를 넣은 불상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번 해인사 목조불상엔 조선 후기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복장유물을 수습한
탓에 통일신라시대의 복장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해인사측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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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국내에서 나온 복장 유물은 옷과 오곡, 오색실, 경전 등이 있다. 복장은 후세 사람들에게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타임캡슐’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남긴 복장 유물은 1984년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문수동자(1466년 제작)상에서 나온 ‘세조의 피고름이 묻은 적삼’.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가 1466년 세조의 건강과 자신의 득남(得男)을 바라며 기록한 발원문 등과 함께 피고름이 묻은 적삼이 나왔다.
덕분에, 세조가 문수동자를 만나 등창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500여년 만에 ‘전설’에서 ‘사실’로 승격했다.
1996년 역시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부처 복장에서 나온 요선철릭(고려 후기)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원나라에서 전래된 이 옷은
활동하기 편하게 허리에 주름을 잡은 남자 옷으로, 고려 후기 복식사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열쇠를 제공했다.
※도움말=강우방 이화여대교수, 곽동석 국립청주박물관장, 최응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박성실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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