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편지명시명언

살구꽃

여여니(여연) 2006. 5. 11. 17:47

 

살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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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4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차례대로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핀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에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바닥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은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굴뚝의 깊이만큼 허기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살구꽃은 안쓰럽게 몇 개의 잎을 떨구어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살구꽃이 함부로 제 몸을 털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살구꽃은 뜰에 나와 앉은 노인들처럼 하루종일 햇살로 아랫배를 채우며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제 몸의 모든 기운을 한곳으로 모아 열매를 맺고 난 뒤, 열매가 단단하게 가지 끝에 매달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타깝게 지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던 아이들의 얼굴 위로 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풋살구를 털 때까지 얼굴 가득 버짐 같은 살구꽃을 달고 잠이 드는 것이었다.


젊은 시인 문신의 시다. 요즘 젊은 시인들한테서 만나기 어려워진 전통적 서정을 전통적인 기법으로 보여주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이런 촌스러움, 이런 구닥다리, 이런 케케묵음, 이런 한가로움, 이런 퇴행이 오히려 신선하게 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나온데 : 2006.5.8 안도현의 아침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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