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편지명시명언

신경림의 '농무'- 안도현

여여니(여연) 2005. 6. 17. 10:15

농 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신경림 시인의 '농무'입니다.

비탈진 달동네 개똥이네 집 지붕이 비만 오면 샌다거나 공장에 나가는 순이가 얼굴이 핼쓱하다는 이야기조차 마음놓고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도 없는 일처럼 꾹꾹 덮어두는 게 제대로 세상을 사는 방식임을 가르치고 또 익히던 시절. 그야말로 가난이 죄라서 문학예술마저 그 가난을 드러내기를 주저했고, 오히려 외면하고 말았던 시절 말입니다.

'농무'라는 한 권의 얇은 시집이 조근조근 따지듯이 되새겨낸 세계는 현실의 사실적 묘사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사건’이 될 만했습니다. 얻어 쓴 조합 빚과 술집 색시의 분 냄새와 담뱃진내 나는 화투판이 소외의 장막을 활짝 걷어 젖히고 신선한 시어가 되어 한국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는 화두를 접한 ‘못난 놈’들이 비로소 소줏잔을 들이키며 당당히 어깨를 흔들 수 있게 되었지요. 한국현대사에서 ‘민중’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은 이렇게 시에서 그 불꽃이 당겨졌다고 생각합니다.
*나온데 : 2005.06.17 안도현의 아침엽서(국정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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