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ː한국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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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불교문화를 받아들인 때는 삼국시대이다. 한국 불교문화사의 시대구분에서 삼국시대는 최초기가 된다. 이 시기에 한반도의 남쪽 낙동강 유역에 가야(伽倻)가 있었고, 그곳에도 불교문화가 들어왔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 받아들인 불교는 하나의 외래종교였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불교는 단순한 종교로서만이 아닌, 전반적인 문화현상으로서 민족문화의 모체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멀리 인도에서 이룩된 불교는 인도의 온갖 문화를 수용·포용하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또 중국으로 전해진 다음에는 중국의 독특하고 우수한 문화와 접촉, 융화되어 풍부하고 다양한 중국적인 불교문화 세계를 이룩하게 되었다. 곧 이와 같은 중국의 불교문화가 한국으로 유입되어 온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불교문화는 육로를 통해서 고구려에 전해졌고, 바다를 건너서 백제로 전해졌는데, 고구려에서 받아들인 불교문화는 주로 전진(前秦)을 비롯한 북방 중국의 불교문화였으며, 백제는 주로 동진(東晉)을 비롯한 남쪽 중국의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는 처음 고구려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고, 그 뒤로는 백제와 중국의 남조·수나라·당나라 등지에서도 전래되었다. 그러나 가야에 전해졌다는 불교문화는 중국계통이 아닌 인도(또는 남방)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받아들여진 불교문화는 고대 신앙이나 고유습속 등 전래의 문화와 잘 융화되어 훌륭한 민족문화로 형성되어졌다.
고구려는 한국에 불교라는 새로운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이다. 372년(소수림왕 2) 북중국의 전진에서 부견왕(符堅王)이 사신과 승려인 순도(順道)를 보내면서 불상과 경전을 보내왔다. 그 뒤 374년(소수림왕 4)에 다시 중국에서 아도(阿道)가 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최초로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웠다. 이를 한국불교의 초전(初傳)으로 삼고, 또 사원 창건의 효시로 본다. 그러나 동진 때의 고승 지순도림(支遁道林)이 고구려의 고승에게 글을 보냈다는 기록이 《양고승전(梁高僧傳)》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전래시기는 상향될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의 불교는 고국양왕을 거쳐 광개토왕 때에 이르면서 크게 융성하여, 평양에 9개의 절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도 많은 절이 창건되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승려들은 해외에서의 구법(求法) 및 전교(傳敎) 활동을 활발히 하였는데,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이루게 한 승랑(僧郞)과 일본에서 활동한 혜편(惠便)·혜자(惠慈)·담징(曇徵)·혜관(惠灌) 등이 있다.
한반도의 남서쪽에 자리한 백제는 바다를 사이에 둔 중국으로부터 해로를 통해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백제가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되어 있는 384년(침류왕 1)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백제로 들어왔다. 백제는 낯선 외국의 승려를 크게 환영하고 또 궁중에서 극진히 공경하였는데, 이 점에서 불교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자세가 엿보인다. 마라난타는 백제에 온 이듬해 절을 짓고 승려를 배출하였고, 552년(성왕 30)에는 일본에 백제불교를 전하였으며, 30대 무왕 때에는 전라북도 익산(益山)에 미륵사(彌勒寺)라는 웅대한 절을 세워 백제의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지금도 익산의 그 절터에는 한국 최고·최대의 석탑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백제의 불교에서 특히 겸익(謙益)은 인도에까지 유학을 다녀와 경전을 스스로 번역하여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가 되었으며, 담혜(曇慧)·도심(道深)·관륵(觀勒)·도장(道藏)·법명(法明)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승려들이 일본문화 전반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삼국 가운데 가장 불리한 지리적 조건과 문화적 후진성으로 인해, 대륙으로부터 일어나는 국제정세 동향과 새로운 문화추세 등에 대해 어두웠던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들어오는 불교문화의 새 흐름을 무조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교를 전하려고 들어왔던 고구려의 고승 정방(正方)과 멸구자가 희생된 사실이 있었으며, 묵호자(墨胡子)와 아도(我道;阿道) 등의 전도승들 또한 밀실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 그 뒤 제23대 법흥왕에 이르러 불교가 공인되었으나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진흥왕대에 들어서면서 흥륜사(興輪寺)·황룡사(皇龍寺) 창건, 승니(僧尼)의 양성과 구법유학 지원, 불사리(佛舍利)와 불상의 조성 및 승통제(僧統制) 마련, 국선화랑(國仙花郞)의 단체 설치 등 불교문화를 진흥시켰다. 이후의 왕들도 진흥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불교문화의 보호와 진흥에 힘썼다. 한편 진평왕 때의 원광(圓光)과 선덕여왕 때의 자장(慈藏) 등의 승려는 교화활동에 공이 컸으며, 현태(玄泰)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인도 등지로 구법유학을 하기도 하였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불완전하나마 통일을 이룩한 신라는 민족적 불교문화의 완성에 주력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으로, 그들은 신라사회의 정신적 기둥이었으며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다. 또한 원효는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 등의 저소(著疏)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울러 경흥(憬興)은 《미륵삼부경소(彌勒三部經疏)》를 비롯한 5부 12권의 저서를 내었고, 유식학(唯識學)의 대가 태현(太賢), 참회법과 점찰간자(占察簡子)로서 참회불교인 점찰교법(占察敎法)을 새로 일으킨 진표(眞表) 및 신인비법(神印秘法)으로 당군(唐軍)의 침입을 미리 막게 한 명랑(明朗) 등은 신라불교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중국에서 활동하며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존경을 받은 원측(圓測)과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귀중한 자료를 남긴 혜초(慧超) 등을 통해 대외적으로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한편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 및 한국 최대의 범종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등이 이 시대에 이루어졌고, 불교문화·음악도 성행하였다.
고려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적극적인 봉불정책(俸彿政策)에 따라 팔관회(八關會)를 베풀어 연례행사로 삼게 하였고, 경유(慶猷)·충담(忠湛)을 왕사(王師)로 삼고 많은 고승 대덕을 존경하여 예우하였다. 태조의 숭불호법(崇佛護法)의 국가적 정신은 역대의 왕들이 모두 계승하여 6대 성종은 송나라로부터 대장경(大藏經)을 들여왔고, 8대 현종과 23대 고종은 불법의 힘으로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각판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대각국사(大覺國師)·보조국사(普照國師)와 같은 훌륭한 고승이 배출되었고, 불교의 여러 종파(宗派)가 이때부터 비롯되어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남산종(南山宗)·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시흥종(始興宗)·신인종(神印宗)·총지종(摠持宗)·중도종(中道宗)·도문중(道門宗) 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대장경》 조성은 고려 불교문화의 집대성인 것이며, 이와 함께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경천사(敬天寺)의 13층탑 및 혜허(慧虛)의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 등이 현존하고 있다. 또 광종 때의 균여(均如)는 불교문화를 통해 불교의 대중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표방한 조선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태조 때 무학(無學)을 왕사로 삼아 개국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이후 억불책으로 인하여 상당히 위축되었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기존의 종단을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양종으로 하였으나,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들 수양(首陽)에게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 하는 등 그간의 억불책에서 다소 후퇴하였다. 그러다가 세조는 불교보호정책을 펴 인경간행(印經刊行)과 불전의 번역 및 불교가무(佛敎歌舞)의 창제에 힘썼고, 불교음악인 《영산회상(靈山會相, 靈山會上)》은 조정의 정악(正樂)으로 되었으며, 또 불교 무용인 연화대무(蓮花臺舞)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조 사후 조선의 불교는 유생들에 의해 가혹한 배척을 받아 1566년(명종 21)에는 양종과 승과가 폐지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뒤 산중에 은거하던 승려들은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을 조직, 혁혁한 전공을 세워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은 왜군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불교문화는 산중에서 이루어졌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불교는 그 핍박의 굴레를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승려에 대한 입성금지령(入城禁止令)의 해제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일본의 니치렌종[日蓮宗(일련종)] 승려의 건의에 따라 당시의 친일내각 총리대신인 김홍집(金弘集)의 결단에 기인한 것이었다. 1899년(고종 36) 동대문 밖(지금의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가 세워져, 한국 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가 되면서 전국의 사원을 통할하였다. 정부에서도 이때부터 국가행정의 범위 안에서 불교를 보호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오랫동안 관심 밖으로 방치되었던 전국의 사찰 및 승려의 위치는 차츰 개선되었다. 한편 1906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불교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가 원흥사를 교사로 하여 세워졌는데, 이는 오늘날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의 모체이며 한용운(韓龍雪) 등이 수학한 곳이기도 하다.
국권이 상실되면서 한국의 불교교단은 일본 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각각 30군데의 교구로 성립되기에 이르렀으나,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통제하는 기구는 마련되지 않았다.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설립되어 중앙통제기구로서의 체제를 갖추었으나, 곧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시 총본산(總本山) 운동이 전개되었다. 1941년 봄 태고사(太古寺;지금의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고 불리던 종단의 이름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결정하였다. 그 뒤 1945년 8·15와 더불어 조선불교조계종은 한국불교조계종(초대교정 鼎鎬)으로 재정비,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한국 불교문화는 민족문화의 근간을 형성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억불로 인해 산중에 은거하면서도 그 문화의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일제강점기 아래에서도 선교양종 또는 조계종의 정통성을 끝까지 지켜왔다. 8·15는 불교계에도 무한한 비약을 기약하는 자유를 누리게는 하였으나, 그에 따른 많은 과제와 문제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그러한 과제와 문제성을 극복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인류가 화합하여 참된 인간을 완성하려는 불교의 목적과 승가(僧伽)의 참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 곧 한국불교의 과제이며 바람이다. 그 동안 한국불교는 호국불교에 치우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이상을 소홀히 하였고 다른 종교와의 갈등에 원만히 대처하지 못한 점도 있었으나, 많은 불자(佛子)들의 대승적 노력과 특히 불교방송(佛敎放送;BBS)의 개국 등으로 인해 오해반목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
*PASCAL백과| http://192.168.0.88/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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