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

불상_PAS

여여니(여연) 2006. 2. 28. 18:20

 

불상  [佛像]



요      약
불타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불교교리에 의한 예배의 대상을 시각적 조형매체를 통하여 표현한 조각상.


설      명
불타(佛陀;Buddha)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불교교리에 의한 예배의 대상을 시각적 조형매체를 통하여 표현한 조각상. 엄격한 뜻에서는 부처[如來(여래)]의 존상만을 의미하지만, 넓은 뜻에서는 부처의 상은 물론 보살상(菩薩像)·천왕상(天王像)·명왕상(明王像)·나한상(羅漢像) 등을 모두 포함한다.


세부 설명

종류

 

불상

불타란 출가하여 수행을 거듭한 뒤 자기 스스로의 진리, 즉 보리(菩提)를 얻은 각자(覺者)라는 의미로서 역사상 실제로 존재하였던 부처는 인도의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로 석가모니(釋迦牟尼), 즉 석존(釋尊)이다. 불교에서는 석존 이전의 과거에도 부처가 있어 연등불(燃燈佛)·다보불(多寶佛) 및 석가를 포함한 과거 칠불(過去七佛;毘婆尸佛·尸棄佛·毘舍浮佛·拘留孫佛·拘那含佛·迦葉佛·釋迦牟尼佛)이 있다고 한다. 또한 여러 정토세계(淨土世界)에도 많은 부처가 있으며 시방(十方)에 걸쳐 많은 부처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배의 대상으로서 한국에서 널리 숭상된 불상으로는 석가불·아미타불(阿彌陀佛)·약사불(藥師佛)·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등이 있다.

 

보살상

보살은 성도(成道) 또는 성불(成佛)의 뜻을 품고 보리를 구하고 있으나 현재는 중생을 교화제도(敎化濟度)하기 위하여 부처를 도와 보살행(菩薩行)을 한다. 상으로 표현될 때는 불상의 양쪽 협시(脇侍)로 표현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옷 입는 형태는 법의(法衣)가 없으며, 상체는 나신(裸身)으로 천의(天衣)라고 부르는 숄같은 것을 어깨에 걸쳐서 몸에 두르며 치마와 같은 상의(裳衣)를 입는다. 불상과 달리 몸에 화려한 장식을 하고 있는데 몸 전체의 구슬장식은 달개[瓔珞(영락)]라 한다. 머리에는 관(冠)·목걸이·팔찌 등으로 장식을 하였는데, 이것은 싯다르타가 성도하기 전 귀인(貴人)으로서 수행하는 과정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손에 연꽃이나 정병(淨甁)·보주(寶珠) 등의 지물(持物)을 들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기타 제상(諸像)

넓은 뜻으로 불상의 범위에는 인도의 불교 성립 이전부터 있었던 브라만교나 민간신앙의 신들이 불교세계를 수호하는 신으로 되어 예배되는 많은 상들이 있다. 즉 천부(天部)에 속하는 범천(梵天)·제석천(帝釋天), 불국토를 사방에서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 성역(聖域)의 입구를 지키는 인왕(仁王), 인도의 토착신앙의 신이었으나 불법에 교화된 팔부신중(八部神衆), 불법을 받들고 불국토를 장엄(莊嚴)하는 비천(飛天) 등이 있다.

 

도상적(圖像的) 특징

불상은 대부분 대좌(臺座) 위에 놓이며 상 뒤에는 광배(光背)가 있어 장엄한 효과를 더해준다. 광배는 머리에 있는 두광(頭光)과 몸 뒤에 있는 신광(身光)으로 구성되고, 주변이 화염문양으로 장식되어 신성함을 강조하여 준다. 광배에는 조그마한 화불(化佛)이 있어 여러 형태로 변화되어 나타나는 영겁의 불타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불상은 인간의 형체를 빌려서 표현하지만, 그 부처가 상징하는 여러 초인간적 성격이 신체적 특징으로 나타난다.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며 머리카락은 짧고 꼬부라져 나발형(螺髮形)이고 귀는 길다. 이마의 한가운데는 백호(白毫)라는 긴 털이 있어 과거·현재·미래를 비추어 볼 수 있는 초월적 능력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것을 크게는 32상 80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의 특징이 있어 보통 인간과 구별된다고 한다. 부처의 법의는 대개 양 어깨를 덮는 통견(通肩) 형식과 한쪽만을 덮는 우견편단(右肩偏袒) 형식으로 구분된다. 불상이나 보살상의 표현에는 그 상의 성격과 의미에 따라 여러 형태의 손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를 수인 혹은 인상(印相)이라 한다. 오른손을 위로 올리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두려워 말라는 의미의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왼손을 밑으로 하여 소원을 받아들인다는 여원인(與願印), 오른손으로 땅을 짚어 지신(地神)에게 부처가 마군(魔軍)을 물리쳤음을 증명하는 자세로서 깨달음의 순간을 상징하는 의미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불법을 설하는 의미의 설법인(說法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일체라는 뜻을 나타낸 지권인(智拳印), 아미타극락정토의 9등급을 나타내는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 등이 가장 대표적 수인이다. 불상과 보살상의 표현에는 자세에 따라서도 그 상징하는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보통은 두 다리를 포개어 앉은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좌상이나 입상(立像)인 경우가 대부분이나,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내리는 의상(倚像), 의자에 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얹어놓은 반가상(半跏像), 두 다리를 교차하고 앉은 교각상(交脚像),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왼발은 직각으로 구부리거나 대좌 밑으로 내려뜨리는 유희좌상(遊戱坐像), 누워 있는 와상(臥像) 등이 있다.

 

기원·전래

인도에서는 석존의 입멸 이후 약 500여 년 동안 불상이 조성되지 않았다. 전설에 의하면 석존이 도리천에 올라가서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에게 설법을 하였는데 이때 열렬한 신자였던 스라바스티성(舍衛城)의 프라스트나지왕(波斯匿王)과 코삼비성의 우다야나왕(優塡王)은 각각 금과 향목(香木)으로 5척의 불상을 만들어서 세상에 석존이 없는 허전함을 달래었다고 한다. 실제 유물상으로 불상이 처음 조성된 시기는 1세기 무렵 쿠샨왕조시대로 불상의 표현이 인체의 형상을 빌려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인도 북서부 간다라지방에서는 헬레니즘문화의 영향으로, 불상이라는 신격(神格)이 인체의 형상을 빌려서 표현되는 그리스의 신상표현의 전통이 작용하여 소조상이나 편마암 조상이 많고 서구적 불안(佛顔)에 사실적 표현이 강조되었다. 중북부의 마투라지방은 인도 고유의 전통을 이어 받아 약간 늦게 불상표현이 등장한 것으로 짐작된다. 인도의 불상은 그 뒤 굽타시대에 가장 이상적 형태의 불상표현이 이루어졌으며 건강한 체구에 균형잡힌 신체비례와 몸에 꼭 달라붙는 법의를 입은 팽팽하고 긴장감이 도는 불신의 표현이 마투라지방과 사르나스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하였다. 12세기 이후에는 힌두교의 융성 등의 영향으로 남으로는 해로로 실론과 동남아시아지역으로, 북으로는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불교문화가 동전(東傳)되면서 발전하였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1세기 무렵 후한시대로 생각된다. 그러나 유물상으로는 장쑤성[江蘇省(강소성)]에서 발견된 후한 말기의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 외에는 대부분 3∼4세기 무렵 청동거울[銅鏡(동경)] 뒷면의 부조나 소형의 도제불(陶製佛), 고식(古式)의 청동불 등에 불과하다. 그 뒤 5호 16국시대에는 북방 호족(胡族)들의 적극적 불교 수용으로 불상제작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특히 후조(後趙)의 건무4년명(建武四年銘, 334년)의 금동불좌상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명문(銘文)이 있는 불상이다. 5세기 후반까지는 북위시대의 불상에는 서역이나 간다라의 영향이 강하였으며, 6세기 이후 중국화된 불상조각이 발달하였다. 또한 둔황[敦煌(돈황)]의 천불동(天佛洞)을 비롯하여 남북조시대에서 당대(唐代)까지 많은 사원과 불교벽화 및 불상이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남조계의 불상은 소규모이며 부드럽고 환미감이 강조되어 온화한 느낌을 주며, 북조의 불상은 강직하고 예리한 조각수법에 엄숙하고 위압하는 듯한 조형감이 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 뒤 수나라의 중국통일로 다양한 요소가 혼합되고, 당대에는 중국 불상조각의 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룽먼[龍門(용문)] 봉선사(奉先寺)의 비로자나본존과 주변의 보살·나한·신장상은 7세기 후반의 긴장감이 있으면서 단정한 조각양식을 대표하며, 8세기 초의 보경사(寶慶寺)의 부조상은 고전적 균형과 조화를 이룬 완숙기의 당대 불상양식을 보여준다.

 

한국 불상양식의 변천

 

삼국시대

불교가 한국에 처음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로서, 현존하는 삼국시대 초기의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서울 근교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이다. 이것은 중국의 북위 초인 5세기 초나 중엽의 불상양식과 유사하여 중국의 전래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초기에는 대체로 중국식 불상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네모난 대좌 위에 두 손을 앞에 모은 선정인(禪定印)의 모습을 한 불좌상은 한국에서 제작된 불상 중 가장 초기의 형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옛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平壤) 원오리 폐사지(元五里廢寺址)의 소조(塑造) 불좌상과 옛 백제의 도읍인 부여(扶餘)의 규암면(窺巖面) 신리(新里)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 등이 있다. 신라에서도 불교가 공인된 이후 6세기 후반에는 대규모의 불상조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566년(진흥왕 5) 완성된 거대한 절 황룡사(皇龍寺)의 절터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장륙(丈六)의 금동삼존불상의 커다란 석조대좌가 남아 있다. 6세기 후반의 삼국시대 불상 중에는 삼존형식이 많으며, 금동계미명삼존불(金銅癸未銘三尊佛;국보 제72호)과 황해도 곡산(谷山) 출토의 금동신묘명삼존불(金銅辛卯銘三尊佛;국보 제85호) 등은 명문이 포함되어 있다. 표현양식은 중국의 북위 말기 및 동위시대의 조각양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세부표현이나 광배의 화염문양, 연화대좌의 표현양식은 중국의 불상들보다 단순화되었고 세부묘사가 생략된 투박한 기법을 보인다. 석조불상으로서 환조(丸彫)는 별로 없으며, 대부분 암벽에 부조(浮彫)로 표현된 조각이 많다. 그 중 옛 백제지역인 충청남도 태안군(泰安郡) 태안읍의 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보물 제432호), 서산시(瑞山市) 운산면(雲山面)의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국보 제84호) 등이 삼국시대의 대표적 보살상 형식이다. 또한 반가사유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서산마애삼존불의 좌측 협시, 경주 근교의 단석산 신선사의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 중 반가사유보살상, 고구려의 금동미륵반가상(국보 제78호·제83호) 등이 전하고 있다.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 중엽에는 법의표현도 자연스러워지며, 상의 측면·뒷면의 묘사에도 관심을 두어 입체조각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7세기의 석불상으로는 경주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보물 제63호)·경주남산삼화령석조삼존불상(慶州南山三花嶺石造三尊佛像) 등이, 금동불상으로는 백제 규암리사지의 금동보살입상 2구, 경상북도 구미(龜尾) 출토의 금동보살입상 2구(국보 제183호·제184호) 등의 관음상이 대표적이다. 삼국시대 말기 보살상의 표현에 있어서는 중국의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초기의 불상양식의 영향이 반영된 조형적 특징들이 나타난다.

 

통일신라시대

이 시기는 한국불교문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불상양식의 시대구분은 통일초∼680년의 보수적 경향이 짙은 전대의 양식계승 및 새로운 요소의 모색기, 680년∼8세기 전반의 중국 당나라 양식의 수용 및 이상적 불상형의 완성기, 750년 무렵 이후의 불상양식의 토착화와 쇠퇴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불상표현형식을 보면 대체로 입상에는 여원인과 시무외인의 통인(通印)을 보여주는 불상이 많고 약함(藥函)을 든 경우도 많다. 법의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경주구황리금제여래입상(慶州九黃里金製如來立像;국보 제80호)과 같이 통견으로, 주름이 가슴 앞으로 여러 겹의 U자형 곡선을 형성하면서 늘어져 있다. 또다른 형식은 경상북도 구미에서 출토된 금동불입상이나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象;국보 제82호)과 같이 통견의 법의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내려오다 허리 밑에서 양 다리 위로 Y자형으로 갈라져서 각기 U자형 주름을 형성하면서 좌우대칭을 이룬다. 자세는 대부분 결가부좌의 좌상이며 수인은 7세기 말부터 나타난 불상 중에는 촉지인의 예가 많다. 경상북도 군위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국보 제109호)의 본존불, 경주남산칠불암마애석불(慶州南山七佛庵磨崖石佛;보물 제200호)의 본존상, 석굴암의 본존불상 등이 대표적 예이다. 보살상은 삼국시대 말기의 양식에서 좀더 화려한 달개장식을 하고, 자연스러우면서 몸의 균형을 유지한 동적인 자세로 변화하며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국보 제81호)이 대표적 예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조각 중 가장 우수한 것은 석굴암의 조상들이라 할 수 있으며, 개개의 조상표현의 조각기술의 세련도, 상의 알맞은 비례, 부드러운 조형성 위에 불상 전체에 흐르는 숭고한 종교성이 조화되어 있다. 8세기 말∼9세기 무렵에 이르면 금동상이 많이 줄어들고 석조상이나 철불상이 많이 등장한다.

 

고려·조선시대

고려시대 전기에는 지방에 따라 몇 가지 특징있는 불상군이 제작되었는데 그 중 강원도 강릉(江陵) 주변의 월정사·한송사지·신복사지의 석조나 대리석 보살상들은 신라말기의 양식을 이어받으면서 중국의 송·요시대의 불상양식이 반영된 듯한 풍만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또한 충청남도·전라북도지역에 많이 보이는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보물 제218호)·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大鳥寺石造彌勒菩薩立像;보물 제217호)과 같이 민간신앙과 밀착된 토착적 또는 지방색이 강한 불상형태가 많이 보이며, 후기에는 원나라와의 관계에 따라 티베트·네팔 계통의 요소도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에 따라 표현의 창의성과 제작기술에서도 퇴보를 가져왔다. 대체로 불신에 비해 머리부분이 크고 신체의 묘사도 형식적이며 조각기법도 뒤떨어져 투박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C) 2006 동서문화사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